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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30. 2023

문화비축기지에서 만난 서용선의 암태도

[석기자미술관]①서용선 프로젝트 - 암태도

     


옛 석유비축기지에서 석유를 빼내고, 그 자리에 문화를 비축하기로 한 것은 탁견이었다. 서울 상암월드컵경기장 옆 널찍한 공간에 호젓하게 자리한 문화비축기지는 각박하기만 한 대도시 서울의 문화적 허파 같은 역할을 해주는 훌륭한 공간이다.     


11월 23일(목) 개막한 <서용선 프로젝트 – 암태도>는 서용선 작가가 전라남도 신안군의 섬 암태도에 있는 암태창고미술관을 빼곡하게 채운 작업의 일부를 서울의 문화비축기지로 옮겨와 선보이는 전시다. 송기숙의 소설 <암태도>로 널리 알려진 ‘암태도소작쟁의’는 1923년에서 1924년에 걸쳐 암태도에서 농사 지으며 살아가던 소작인들이 중심이 돼 과도한 소작료를 인하하라고 요구한 조직적인 비폭력 저항으로 엄혹했던 일제강점기에 땅을 움켜쥔 지주들을 상대로 거둔 빛나는 승리의 역사로 기록돼 있다.     



일찍이 동학농민운동(1894년)과 3.1운동(1919년)의 역사를 화폭 위에 불러낸 서용선 작가가 그 역사의 연장선에서 암태도소작쟁의(1923년)를 새 작업의 주제로 삼은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다른 어느 누가 이 역사적 의미가 깊은 과업을 감당할 수 있었겠는가. 선 굵은 붓질, 강렬하고 묵직한 색채를 특징으로 하는 서용선 작가의 독보적인 회화 세계 또한 그 시대를 비추는 데 더없이 잘 어울리지 않는가.


     


시원하게 펼쳐진 문화마당을 바라보고 오른쪽 설비동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당시의 역사적 배경 속에서 고통으로 점철된 상황과 왜곡된 현실을 상징하는 농민을 형상화한 서용선 작가의 조각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설비동 내부 계단을 따라 T5 공간까지 이어지는 동선 곳곳에 놓인 조각이 전시의 마중물이 된다. 거꾸로 서 있는 형상을 통해 작가는 왜곡되고 정상적이지 않은 시대 상황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의 주 전시공간은 T5. 먼저 1층 영상미디어관에 들어서면 둥근 벽면 가득 영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서용선 작가가 완성한 암태창고미술관을 들어서 옮길 순 없으니 미술관의 벽을 수놓은 작품을 중심으로 암태도 작업을 구성하는 주요 작품, 그리고 그곳을 배경으로 한 판소리 공연 장면과 함께 서용선 작가의 인터뷰가 소개된다.      



옛 석유비축기지라는 공간적 특성을 요령껏 잘 활용해 서용선의 암태도 작업의 전체적인 그림을 볼 수 있다. 소리하는 장면에서 왼손으로 북을 치는 인물을 가만히 보니 낯익은 사람이다. 암태도 옆 자은도에 터전을 마련한 한국화가 조풍류 화백이 아닌가. 언젠가 서용선 작가의 암태창고미술관을 찾아갔다가 즉흥적으로 소리판을 벌였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그 장면을 담은 영상을 작품에 그대로 담았다. 숨은 그림 찾는 재미가 있다.     



영상으로 작업의 큰 얼개를 알고 난 뒤 2층 전시장으로 올라가면 본격적으로 서용선 작가의 암태도 작업이 펼쳐진다. 암태도소작쟁의는 물론 앞선 역사적 배경이 된 동학농민운동과 3.1운동의 역사를 그린 회화와 드로잉을 만날 수 있다. 서용선 작가의 그림에서 보이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작업 날짜를 화면에 크게 써넣는 것인데, 그것 자체가 화면 속에서 전혀 이질적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또 하나는 암태도소작쟁의를 다룬 당시 신문기사 문구를 작가가 직접 손으로 써서 그림과 나란히 감상할 수 있게 한 점이다. <하늘>이라는 제목이 붙은 작품은 풀밭에 가만히 누운 농민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인데,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김수영의 시 <풀>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저항’의 정신이다.     


풀이 눕는다

비를 몰아오는 동풍에 나부껴

풀은 눕고

드디어 울었다.

날이 흐려서 더 울다가

다시 누웠다     


풀이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눕는다

바람보다도 더 빨리 울고

바람보다 먼저 일어난다.     


날이 흐리고 풀이 눕는다

발목까지

발목까지 눕는다

바람보다도 늦게 누워도

바람보다 먼저 일어나고

바람보다 늦게 울어도

바람보다 먼저 웃는다

날이 흐리고 풀뿌리가 눕는다     



T5를 뒤로하고 다음 전시공간 T6로 이동한다. 옛 석유저장탱크의 외형을 그대로 유지한 이 공간은 나선으로 굽은 동선이 이채로운데, 길을 따라 죽 올라가면서 암태도소작쟁의의 역사적 배경이 된 동학농민운동, 포츠머스회담, 을사늑약, 3.1운동을 형상화한 서용선 작가의 대형 작품들을 만날 수 있다.     



서용선 작가의 작품은 단단하고 묵직하다. 우리와 같은 시대를 함께 호흡하면서 일흔이 넘은 지금도 젊은 작가들 못지않게 왕성한 창작활동을 이어오는 작가의 모습이 작품에 그대로 드러난다. 그만한 역사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는 예술가야말로 진정 거장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을 터.     

암태도소작쟁의가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무엇일까. 이 남루하고 누추하기 짝이 없는 현실에서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무엇인가. 서용선의 작업은 그걸 묻고 있는 게 아닐까.     


전시정보

제목: 서용선 프로젝트 - 암태도

기간: 2024년 5월 5일까지

장소: 서울시 문화비축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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