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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Nov 28. 2023

화가와 저널리스트의 아름다운 우정

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퍼드 <봄은 언제나 찾아온다>


언제부터인가 데이비드 호크니의 이름 앞에는 ‘세계에서 작품 가격이 가장 비싼 생존작가’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나지 않는 한 호크니는 자기 작품이 경매 최고가를 기록하는 모습을 살아서 지켜본 드문 화가로 남을 것이다. 무엇이 호크니를 그토록 각광받게 했을까. 호크니의 그림을 아주 드물게 본 적은 있지만, 그의 작품이 그만한 ‘상품성’을 지니고 있는지는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국내 경매시장에서도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호크니의 아이패드 드로잉에서도 아주 특별한 감흥을 얻지는 못했다.     


어떤 화가의 예술 세계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화가 본인일 수 있다. 아니면 그 화가의 진정한 가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주변인일 수도 있다. 호크니와 오랜 기간 돈독한 교분을 맺은 저널리스트이자 비평가 마틴 게이퍼드가 바로 그런 존재일 것이다. 게이퍼드의 글을 읽고 있노라면 호크니를 향한 게이퍼드의 태도는 지적 이해의 차원을 넘어 인간적인 애정으로 가득 차 있음을 보게 된다. 화가와 저널리스트의 그 끈끈한 우정이 몹시도 부럽다. 나도 내가 아는 어떤 화가를 위해 이런 책을 쓸 수 있을까.     


이 사려 깊은 에세이는 전 세계를 뒤덮은 코로나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프랑스의 노르망디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머무른 호크니와의 대화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호크니는 노르망디에 머무는 동안 수없이 아이패드 드로잉을 그렸다. 그림의 대상은 특별한 것 없어 보이는 집 주변의 풍경들이다. 어쩔 수 없이 한곳에 머물 수밖에 없는 봉쇄 상황은 도리어 불필요한 만남 때문에 그림에 집중할 수 없다는 사실에 괴로워했던 노화가에게는 그림에 집중할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가 되어주었다.     


예술가는 삶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이다. 단편적인 그림 한 점 한 점만 보아서는 호크니 예술의 진면모를 깨닫기 어렵지만, 게이퍼드와 호크니가 함께 펼쳐지는 조화로운 화음을 따라가다 보면 호크니의 그림이 왜 그토록 중요하게 평가되는지 절로 알게 된다. 물론 호크니의 예술이 지닌 매력이 가장 큰 이유겠지만, 게이퍼드라는 훌륭한 동반자가 호크니의 예술을 더욱 더 빛나게 해준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 면에서 게이퍼드라는 친구를 둔 호크니는 대단히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일 테고.     


이야기는 재미있어야 하고, 예술은 즐거움을 주어야 한다. 호크니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예술에 즐거움의 원칙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원칙이 없다면 예술은 이 순간 존재하지 않을 겁니다. 예술을 거의 소멸시킬 수도 있겠지만, 예술은 여전히 존재해야 합니다. 그것은 극장 관람과 유사합니다. 여흥은 최대가 아니라 최소한의 요건입니다. 모든 것은 즐거움을 주어야 합니다.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갈 수도 있겠지만, 어떤 경우든 적어도 즐거움을 성취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에서 즐거움의 원리는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대목까지 읽어야 이 말의 맥락을 더 분명히 알 수 있다. 게이퍼드는 호크니의 이 말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호크니가 말하는 즐거움이란 그림 안에서 세계와 고통과 전쟁, 죽음을 포함해 세계 안의 만물과 만사를 보는 것에서 비롯되는 즐거움이다. 이것은 언어가 아닌 시각적으로 수행하는 사색의 과정이다. 보는 행위를 통해 세계를 즐기고 세계를 이해하는 것이다. 그림은 세계에 대한 해석이고 따라서 눈을 통해 정신으로 직접 전달되는 소통 수단이다.”     


어떤 화가의 예술 세계를 제대로 만나는 방법이 꼭 전시회일 필요는 없다. 2019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열린 호크니 전시는 말 그대로 엄청난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당시 이 전시를 본 나는 호크니의 무엇이 그토록 열광을 불러일으키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이후에 본 아이패드 드로잉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생각이 달라졌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비로소 호크니의 얼마나 매력적인 화가인지 알게 된 것이다. 독서를 통해 얻은 값진 수확이다.     


호크니의 그림 속 풍경은 사실 평범해 보인다. 오랫동안 호크니의 그림에 쉽사리 끌리지 못했던 이유다. 하지만 자세히, 세심하게 그림을 들여다보면 지금까지 피상적으로 볼 때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호크니의 풍경에는 어떤 대단한 비결이 숨어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극한 평범함이 비결이라면 비결이겠다. 그 평범함이야말로 호크니의 예술을 온당하게 이해하는 핵심이다.     


“그가 요크셔에서 그린 들판과 숲은 충분히 유쾌하지만 다른 수천 곳의 영국 외딴 시골보다 특별히 더 매력적이지는 않았다. (오히려 상당히 유사했다.) 어떤 측면에서 이미 잘 알려진 장소는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장소보다 더 많은 난제를 제시한다. (중략) 저확히 말해 이 풍경들이 특별한 것은 호크니가 오랜 시간 연구하고 내면화한 그만의 풍경들이기 때문이다. 그는 이 풍경들을 깊이 그리고 철저히, 상세하게 알고 있으며 관심을 쏟는 시간이 쌓이면서 더 많은 것을 보고 이해해 가고 있다. 그에 따라 이 익숙한 장소들이 화가가 필요로 할 수 있는 모든 요소들을 담고 있는 소우주라는 사실이 점차 드러난다.     


여기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본질적으로 흥미로운 것은 장소가 아니라 그곳을 보는 사람이다.     

이 책을 읽는 내내 잘 아는 화가의 이름을 거듭해서 떠올렸다. 게이퍼드가 호크니를 위해 썼듯, 나 또한 그 화가를 위해 이런 글을 쓰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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