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⑩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이야기
동양 미술을 이해하려면 인도에서 시작해야 한다. 인도에서 발원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전파돼 오늘에 이르기 때문. 강희정 교수의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도 그래서 인도 미술로 출발한다.
이 전시는 올해 7월부터 11월까지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미술관이 연 <나무와 뱀, 인도 초기 불교미술 Tree & Serpent: Early Buddhist Art in India>의 한국 전시다. 같은 전시물을 우리 실정에 맞게 새로 구성하고, 전시 설명문도 아주 쉽게 다시 썼다. 고대 남인도 불교 미술의 세계가 관람객들에게 낯설기 때문이다.
전시장에서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유물은 스투파를 장식했던 부조 <사타바하나의 왕과 그의 시종들>. 인도 최초의 통일 왕조인 마우리아 왕조가 무너진 이후 300년 넘게 인도 데칸고원 동남부를 다스린 사타바하나 왕조 시기에 수많은 스투파가 남인도 전역에 세워진다. 스투파(stūpa)란 불교에서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된 이의 사리를 모시는 석조 건축물이다. 이것이 후대에 변형을 거쳐 중국을 통해 한국에 전래한 것이 바로 탑(塔)이다.
합장하듯 두 손을 가지런히 모은 사타바하나의 왕은 본래 힌두교도로 알려졌지만, 이 시기에 스투파가 집중적으로 조성됐다는 것은 불교의 자연스러운 전파에 거부감이 없었음을 보여준다. 북인도에서 내려온 불교가 남인도 지역에 자연스럽게 뿌리 내려 스며들 수 있었던 건 당시 남인도인들의 ‘유연성’ 덕분. 신앙 체계로서의 불교가 가진 특유의 ‘유연성’과 만나 조화를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도상 식물은 연꽃이다. 빠르게 군락을 이루며 뻗어나가는 연꽃 넝쿨은 풍요와 번영, 더 나아가 자연의 끊임없는 생성과 소멸을 넘어 무한한 생명과 윤회를 뜻한다. 그런 연꽃 줄기를 입에서 쉴 새 없이 뿜어내는 존재는 남인도 신화에서 사람의 형상으로 표현된 자연의 정령. 풍만한 여성의 모습으로 형상화된 저 신은 ‘락슈미’라 불리는 풍요의 신이다.
악어 주둥이에 코끼리 코, 물고기 지느러미 모양을 한 귀, 달팽이처럼 말린 긴 꼬리에 몸통이 비늘로 덮인 마카라(makara)는 실재하지 않는 전설 속 동물이다. 이 동물이 불교에 편입돼 스투파를 지키는 수호신 역할을 했음을 이 장식 부조가 분명하게 보여준다. 사자 머리를 한 또 다른 모습의 마카라도 스투파를 장식했던 존재다.
남인도인들은 자연의 정령을 의인화해 사람의 모습으로 표현하고 신으로 모셨다. 그중에서도 나무와 대지에 깃든 신을 남성형은 ‘약샤’, 여성형은 ‘약시’라 불렀다. 남인도인들이 오랫동안 믿어온 자연의 정령은 불교가 전해졌을 때 이미 의인화 단계에 진입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스투파를 장식하게 됐고, 오늘날 남아 전하는 조각도 꽤 많다.
또 하나 중요한 도상으로 머리 여섯 달린 뱀이 있다. ‘나가’라는 이름의 이 뱀은 오래전부터 강에서 살았는데, 석가모니의 가르침에 감화돼 불교에 편입된다. 이 모두 당시 불교가 남인도의 전통 신앙과 어울려 그 지역에 순조롭게 뿌리 내렸음을 보여준다.
인도 하면 빼놓을 수 없는 대표적인 동물이 바로 코끼리다. 코끼리는 힌두교의 신 인드라(Indra)가 타고 다니던 동물로 왕과 귀족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만 탈 수 있었기에 예부터 귀하게 여겨졌다. 스투파 장식 부조에서도 어김없이 그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스투파 안에 귀한 사리를 안치해야 했던 만큼 사리를 담는 병, 병을 담는 단지로 정성을 다해 만들었을 것이다. 여기서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저 유명한 아소카 왕이다. 마우리아 왕조의 세 번째 군주인 아소카 왕은 생전에 포악하기로 유명했으나 부처님의 가르침을 접한 뒤 깨달음을 얻어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인도 전역을 불교의 가르침에 따라 통치하고자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여덟 기의 탑 ‘근본팔탑’을 열고 사리를 꺼내 인도 각지로 보내 스투파를 세우고 안치하도록 했다. 그렇게 조성된 스투파가 자그마치 8만 4천 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렇게 사리를 꺼내서 나눠 보낼 때 귀한 보석을 함께 넣도록 한 것이 바로 아소카 왕이었고, 이 보석은 사리 못지않게 귀하게 여겨졌다고 한다. 이번 전시의 대표작이라 해도 좋을 특별한 유물이다.
초창기 불교에는 불상이 없다. 이 사진에서 석가모니의 자리는 비어 있다. 아직 석가모니의 모습을 형상화할 엄두를 내지 못한 당시 사람들은 대신 보리수와 빈자리로 석가모니의 존재를 표현했다. 때로는 머리 여섯 달린 뱀 ‘나가’가 함께 등장하기도 하는데,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싯다르타>에서 비가 내리자 뱀이 석가모니 위로 몸을 뻗어 비를 맞지 않게 하는 장면을 보여주기도 했다. 발바닥과 그 가운데 둥근 수레바퀴 모두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도상이다.
석가모니의 수레바퀴를 일컬어 법륜(法輪)이라 한다.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가는 수레바퀴처럼 석가모니의 가르침도 그러하리라는 뜻이 담겼다. 그리고 그런 석가모니의 가르침, 법륜에 따라 나라를 잘 다스리는 왕을 전륜성왕(轉輪聖王)이라 했다. 인도 전역에 스투파를 세우게 한 아소카 왕도 스스로 전륜성왕이라 칭했다고 한다.
스투파를 장식한 부조에는 석가모니의 전생 이야기와 현생 이야기를 보여주는 장면도 꽤 많다. 옛사람들은 이렇게 수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석가모니라는 존재를 기억하는 스투파에 새겨넣었다. 그리고 얼마 뒤 드디어 석가모니의 모습이 구체적인 조각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무불상의 시대가 끝나고 불상의 시대가 도래한 것. 전시는 여기까지를 보여준다.
강희정 교수의 <난처한 동양미술 이야기> 1권으로 개념을 쉽고도 확실하게 이해하고 나면 더없이 유익한 공부가 된다.
■전시 정보
제목: 스투파의 숲, 신비로운 인도이야기
기간: 2024년 4월 14일(일)까지
장소: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
전시품: <머리 다섯 달린 뱀이 지키는 스투파> 등 남인도 불교미술품 97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