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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06. 2024

수학의 도형은 어떻게 화가의 캔버스로 들어왔나

[석기자미술관]⑪ 국립현대미술관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된다. 구체적인 형상을 벗어나 이 단순한 원리를 화폭에 주체적으로 적용한 것이 바로 기하학적 추상미술이다. 1920~30년대에 서양 미술에서 다양한 자양분을 흡수한 화가들은 새로운 시대의 미술로서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받아들여 자기화한다. 그리하여 한국의 기하 추상은 1960~70년대에 난만하게 꽃을 피웠다. 물론 그 뒤로도 이름만 붙이지 않았을 뿐이지 그 흐름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     

이번 전시는 한국 추상미술에서도 기하학적 추상미술로 범주화할 수 있는 작가 47명의 작품 150여 점을 한자리에 선보이는 교과서적인 전시다. 한국 미술사에서 앵포르멜이나 단색화 등 다른 경향에 비해 비주류로 여겨져 온 기하학적 추상미술 고유의 예술성과 그 가치를 재발견하고 재평가해보자는 것.     


김환기 <론도>, 1938, 캔버스에 유채, 61×71.5cm, 국립현대미술관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김환기의 작품 <론도>(1938)가 관람객을 맞는다. 지난해 호암미술관 김환기 전에서도 소개된 이 그림은 한국 최초의 기하학적 회화로 평가되는 선구적 작품이다. 직선과 곡선이 만나고 교차하며 만들어낸 면에 색의 변화를 줌으로써 독특한 리듬감을 표현한 작품이다. 그래서 이름도 ‘론도’다.     

     

유영국 <작품 1(L24-39.5)>, 1939(1979 유리지 재제작), 혼합 재료, 70×90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유영국 <10-7>, 1940, 캔버스에 유채, 38×45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전시는 5개 주제로 나뉜다. 1주제 <새로움과 혁신, 근대의 감각>에서는 근대기에 미술과 디자인, 문학의 영역까지 확장된 기하학적 추상의 사례를 보여준다. 유영국이 일본 유학 시절 시도했던 합판을 이용한 작품들이 눈길이 끈다. 전시장에 걸린 합판 작품은 모두 화가의 딸은 유리지가 다시 제작한 것이다. 미술관은 이 가운데 1939년 작 <작품 1(L24-39.5)>를 대표작으로 꼽았다. 유영국의 초기 추상을 보여주는 1940년 작 <10-7>이 나란히 걸렸다.     


변영원 <반공여혼>, 1952,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김충선 <무제>, 1959,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


내가 이 전시에서 가장 주목해서 본 건 2주제 <한국의 바우하우스를 꿈꾸며, 신조형파>다. 전쟁이 끝나고 한창 국가를 재건하던 시기인 1957년 화가와 건축가, 디자이너가 모여 ‘신조형파’를 결성한다. 1957년 6월에 발표한 이념선언에서 신조형파는 다음과 같이 천명한다.     


현대란 무엇이냐?

창조란 무엇인가? 그리고

현실은 어떠한 것이냐?

이 제재(題材)는 우리들의 과제다.     

(중략)     

언제나 ‘새로움’이란 진실하고 영원한 우주에서 발견창조되었었다.

우리들은 창조의 철칙을 고수하여 오로지 현대미술의 창조탐구에 투철할 것을 서로 서약하고 아래와 같이 이념을 선언한다.     


1. 우리들은 민족미술의 창조적 전통성을 계승한다.

2. 우리는 현대미술의 새로운 창조탐구에 전념한다.

3. 우리들은 현대미술의 생활화에 직접 행동한다.     


이상욱 <무제>, 1970, 캔버스에 유채, 유족 소장


(좌) 조병현 <작품 10-67>, 1969, 캔버스에 유채, 유족 소장   (우) 조병현 <작품 2-69>, 1969, 캔버스에 유채, 국립현대미술관


변희천, 제목 미상, 1960, 하드보드에 유채, 89×70.5, 부산시립미술관

    

과거에서 배워 현재를 만들되 쓸모에도 이바지하겠다는 다짐이다. 신조형파에 화가뿐 아니라 건축가와 디자이너가 함께한 이유다. 새로운 시대에 미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 이들이 바로 신조형파였다. 이들이 각자 다른 개성으로 탄생시킨 작품들은 한국 기하학적 추상미술의 외연을 확장했고, 이후 1960~70년대에 맹활약하는 작가들에게 예술적 자양분을 제공했다. 변영원, 이상욱, 조병현, 김충선, 변희천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전성우 <색동만다라>, 1968, 캔버스에 아크릴릭, 168×136.3, 유족 소장


3주제 <산과 달, 마음의 기하학>은 한국적인 기하 추상의 특수성을 보여준다. 화가들이 기하 추상을 어떻게 우리 전통이나 도상과 결부시켜 자기화했는지 볼 수 있다. 이 주제를 보여주는 전시장 입구에는 전성우의 작품이 앞뒤로 나란히 걸렸는데, 작가가 1968년에 선보인 <색동만다라>는 삼각 캔버스라는 독특한 형태뿐 아니라 산뜻한 색감이 매력적인 작품이다.     


이 주제에도 쟁쟁한 작품이 많다. 일찍이 미술사가 황정수 선생이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이규상의 1960년 작 <작품 A>를 비롯해 임완규, 문우식, 이준, 박길웅, 하인두, 김창억, 류경채, 이기원 작가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아울러 김환기, 유영국의 작품이 하이라이트를 장식한다.     


이규상 <작품 A>, 1960, 합판에 유채, 155×90cm, 고려대학교박물관


임완규 <황(黃)>, 1960, 캔버스에 유채, 111×111cm, 국립현대미술관


박길웅 <적 No.2>, 1968, 캔버스에 유채, 130.3×130.3cm, 국립현대미술관


하인두 <피안>, 1979, 캔버스에 유채, 116×91cm, 국립현대미술관


김창억 <환상>, 1964, 캔버스에 유채, 131×161cm, 개인 소장


류경채 <날'79-6>, 1979, 캔버스에 유채, 130×162cm, 국립현대미술관


(좌) 이기원 <투영 75-Q>, 1975, 유족 소장  (우) 이기원 <간섭 81-1>, 1981, 유족 소장


유영국 작품


김환기 직품 ⓒ (재)환기재단․환기미술관


4주제 <기하학적 추상의 시대>에서는 1960년대 후반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난만하게 뻗어나간 기하 추상 작품들을 선보인다. 김수익, 최명영, 서승원, 문복철, 최창홍, 이태현, 함섭, 최종섭, 김종일, 하종현, 박서보, 조용익, 김인환, 윤명로, 최상철, 한영섭, 김한, 하동철, 김재관, 변영원, 김봉태, 한묵, 이성자의 작품이 나왔다.      


(좌) 최명영 <오(悟) 68-A>, 1968, 국립현대미술관  (우) 최명영 <오(悟) 68-C>, 1968, 작가 소장


서승원 <동시성 68-9>, 1968, 캔버스에 유채, 162×112cm, 작가 소장


문복철 <작품 67-102>, 1967, 캔버스에 유채, 163×131cm, 국립현대미술관


최창홍 <환원-3>, 1969, 캔버스에 유채, 129.7×129.7, 국립현대미술관


이태현 <공간 70-1>, 1970, 캔버스에 유채, 1305×129.5cm, 국립현대미술관


함섭 <환원-71>, 1971, 캔버스에 유채, 130×130cm, 작가 소장


(좌) 하종현 <도시 계획 백서>, 1970, 국립현대미술관  (우) 하종현 <도시 계획 백서 68>, 1968, 작가 소장


박서보 <유전질 No.1-68>, 1968, 캔버스에 유채, 79.8×79cm, 국립현대미술관


(좌) 김인환 <단청>, 1972, 국립현대미술관  (우) 김인환 <단청시리즈>, 1970, 부산시립미술관


최상철 <1970년 여름-K>, 1970, 캔버스에 유채, 200×200cm, 국립현대미술관


한영섭 <단청과 콘크리트 NO.9>, 1969, 캔버스에 유채, 140×140cm, 작가 소장


(좌) 하동철 <반응-72-베타>, 1972, 국립현대미술관  (우) 하동철 <반응-72-감마>, 1972, 국립현대미술관


김재관 <운명 1970-1(70-2021)>, 1970-2021, 캔버스에 아크릴릭, 193.9×259.1cm, 청주시립미술관


변영원의 작품


(좌) 김봉태 <그림자연작 79-28>  (우) 김봉태 <그림자연작 79-25>, 1979(2015년 재제작), 작가소장


한묵 <금색운의 교차>, 1991, 캔버스에 유채, 254×202cm, 국립현대미술관


이성자 <극지로 가는 길 87년 5월>, 1987, 캔버스에 아크릴릭, 200×200cm, 국립현대미술관


특히 인류의 우주 개척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밝힌 이승조 작가가 1970년 <제4회 오리진> 전에 출품했던 <핵 G-999>가 53년 만에 재공개되고, 윤형근의 1969년 작 <69-E8>은 이번 전시를 통해 최초로 공개된다. 


이승조 <핵 G-999>, 1970, 캔버스에 유채, 192×111cm, 국립현대미술관


윤형근 <69-E8>, 1969, 면천에 유채, 165×145cm, 국립현대미술관


기하학적 추상미술을 주제로 한국 미술의 귀중한 자산을 한자리에 모아 전시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더없이 좋은 공부가 된다.


■전시 정보

제목: 한국의 기하학적 추상미술

기간: 2024년 5월 19일(일)까지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과천

전시품: 기하학적 추상미술 작품 150여 점, 아카이브 100여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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