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신안군 암태면 단고리 99-1번지. 그리스의 산토리니를 떠올리게 하는 파란 지붕에 흰 창고 건물. 이곳은 과거 농협창고로 쓰이던 곳으로, 양곡창고의 옛 골격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요란하게 꾸미지 않은 까닭에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면 놓치고 마는 공간. 마을 안에 자연스럽게 깃들어 주변 건물들과 어깨를 맞대고 있다. 양곡창고는 미술관으로 다시 태어났다.
1923년 8월부터 1924년 8월까지 암태도 주민들은 지주에 맞서 싸웠다. 요구는 간단했다. 소작료를 내려달라. 한 해 동안 뼈 빠지게 농사를 지어도 가을걷이를 하고 나면 농민들에게 돌아오는 몫은 늘 터무니없이 작았다. 게다가 다른 지역에서는 이미 농민들의 거센 요구에 굴복한 지주들이 소작료를 내렸다는 소식까지 전해졌다. 암태도 농민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소작인회를 조직해 단체 행동에 나섰다. 배를 타고 목포로 건너가 경찰서를 찾아가고, 법원에서 시위를 벌이고, 심지어 곡기를 끊는 단식투쟁까지 결행한다. 소작인뿐만 아니라 청년회, 부인회까지 참여한 자발적인 민중항쟁이었다. 끝내 농민들은 승리했다.
서용선 작가는 농민과 지주 사이의 분배 갈등을 상징하는 양곡창고를 암태소작쟁의 100년을 되새기는 공간으로 만들었다. 장소의 상징성을 살리고자 창고의 옛 모습을 가능한 그대로 유지하면서 70여 평 규모의 창고 내부에 암태소작쟁의의 주요 과정을 그림과 글, 조형물 등으로 꾸몄다. 전시장 입구부터 시계 반대 방향으로 일곱 가지 주요 장면이 펼쳐진다. 잘 정리된 전시 안내 책자의 내용을 참고해 내 식대로 다듬는다.
(1) 3.1운동과 동학
1919년 3.1운동은 일제의 통치 기간에서 분수령이 된 사건이다. 1924년의 소작쟁의는 3.1운동의 영향으로 소작 농민의 노동 대가에 대한 분배 문제와 더불어 억압적인 일제하의 정치․경제 상황 속에서 터져 나왔다. 암태소작쟁의를 이끈 암태면장 출신 서태석의 부모는 동학교도였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이라는 나라가 꺼져가던 시기에 들불처럼 일어난 동학운동의 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다.
첫 장면에선 동학 교주인 최제우, 최시형, 손병희 등의 초상과 3.1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파고다 공원이 보인다. 아래 붉은색 그림은 동학운동의 한 장면이다.
(2) 범선항해(목포행)
1924년 6월 암태도 주민들은 면민대회를 열고 결의를 다진 뒤 400여 명이 목포로 나가 경찰에 구속된 농민대표 석방 운동을 벌인다. 그리고 7월 7일경 다시 목포로 나가 단식운동을 하기로 하고 500여 명이 목포지청 검사국으로 가 수감된 농민 대표 열세 명을 석방하라는 이른바 ‘아사동맹’을 결행했다. 배를 타고 목포로 향하는 그들은 비장했을 것이고 다가올 미래에 대한 걱정 또한 깊었을 것이다. 암태도 주민 수백 명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는 모습은 그 자체로 장관을 이뤘으리라.
(3) 목포시가지
1920년대 목포시가지를 통해 당시 상황을 상상해본다. 농민들의 집단 항의 농성은 목포 시내 경찰서, 법원 등에서 진행됐다. 일제 통치권자들은 농민들의 이런 저항이 내심 불안했다. 서태석은 직접 경찰서에 찾아가 논리적으로 따지기도 했다. 잘 구획된 시가지 모습은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던 한국 사회의 근대적 변화상을 보여준다.
(4) 아사동맹
암태도 주민들은 자기 대표자들이 경찰에 구속되자 목포에 나가 항의했다.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자는 것도 해결하기 쉽지 않은 상황에서 집을 떠나 타지에서 수백 명이 항의하며 밤을 지새우는 모습을 떠올려 보라. 암태도 주민들의 행동은 목포 시민들의 관심을 끌었고, 이후 커다란 사회 문제로 언론에 보도됐다.
(5) 재판
패널 25장으로 이뤄진 이 그림들은 텀블럭 행사를 통해 참여자들이 직접 그린 것이다. 일본인 관리와 경찰의 감시 아래 소작쟁의에 참가한 농민들은 불리한 판결을 받았고, 그 가운데 일부는 수감된다. 당시 판결에서 서태석이 징역 24년을 받은 것을 비롯해 14명이 판결 대상에 올랐다.
(6) 갈등
화해할 수 없는 두 세력의 갈등을 서로 다른 방향으로 그려낸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대비해서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래위에 적힌 문구들도 보인다. 서용선 작가는 톱을 이용해 나무 판재 표면을 사선으로 긁어 거친 질감을 만들고 그 위에 색을 입혔다.
(7) 하늘을 보다(서태석의 죽음)
혹독한 일제 통치 시기에 외딴 섬 암태도에서 소작인회를 결성하고 지주에 맞선 서태석의 마지막 모습을 그린 것이다. 서태석은 1920년 목포 3.1운동을 전개하다 체포돼 수감생활을 한 전력이 있어 암태소작쟁의 당시 가장 무거운 형량을 받았다. 소작쟁의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서태석은 여러 차례 수감생활과 일제의 고문 등으로 정신이 피폐해져 불행한 말년을 살다가 압해도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2000년대가 돼서야 국가는 그 공훈을 인정해 건축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암태소작쟁의의 주체는 소작농이었다. 그들은 일제의 곡물 수탈정책으로 고통받았고, 지주와의 관계에서도 고통받았다. 그런 이중의 고통에 갇힌 농민의 모습을 철시 작품으로 표현했다. 벽면에 그려진 여러 형상은 건축물을 떠받치는 구조로 함께 존재한다. 이 설치물은 건물 내부 공간 전체와 호흡하며 사건의 본질인 농민들의 상황을 나타낸다.
외부 벽면에도 그림이 있다. 건물을 바라보고 오른쪽 벽에 그려진 것은 들판에 선 농민들의 모습이다. 건물 전면에는 소작쟁의의 주역이었던 농민들을 그려 넣었다. 시간이 지나 페인트가 부식해 떨어질 것에 대비해 벽을 파내 접착제를 발랐고, 나중에 칠이 벗겨지더라도 쉽게 복원할 수 있도록 했다고 한다.
암태도를 상징하는 이 유서 깊은 공간은 현장의 미술관이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모범 사례로 남을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업을 서용선 작가에게 의뢰한 것이 신의 한 수였다. 이만한 무게의 역사를 감당하며 그걸 현대적인 예술로 풀어낼 수 있는 다른 작가가 나는 떠오르지 않는다. 옆 전시장의 아카이브 자료만 알뜰하게 보강하면 더할 나위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