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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01. 2024

시인 기형도의 집에서 다시 시를 만나다

[문학관 기행]①경기도 광명시 기형도문학관

거리의 상상력은 고통이었고 나는 그 고통을 사랑하였다.

그러나 가장 위대한 잠언이 자연 속에 있음을 지금도 나는 믿는다.

그러한 믿음이 언젠가 나를 부를 것이다.     


선생님과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국문과에 진학한 첫해, 내가 주워섬긴 많은 시인 중에 기형도가 있었다. 시집 한 권이면 제법 근사한 낭만주의자 행세를 할 수 있었고, 청춘의 풋내로 가득했던 교정에서 시를 읽고 시를 외우고 시를 끼적거렸다. 지금은 시로부터 꽤 멀어졌지만, 그때 산 시집 몇 권은 아직 버리지 못했다. 기형도의 첫 시집이자 유고시집 <입속의 검은 잎>이 그렇다.



너무 일찍 세상을 등진 시인. 불혹이 되기 꼭 한 해 전에 서울 종로의 심야극장에서 객사한 시인이 남긴 자취는 강렬했다. 유족과 지인이 뜻을 모아 시인을 기리는 공간을 만들어 고인을 시심(詩心)으로 더 살게 하기로 했다. 2017년 11월 10일, 시인의 고향 경기도 광명시에 기형도문학관이 문을 열었다. 아무도 없는 전시장은 나를 30년 전 그때로 다시 데려갔다.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흰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 집에 갇혔네     



1층은 기형도 시인의 삶과 문학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아기자기하게 꾸며졌다. 책장 모양으로 꾸며진 입구를 지나 전시실 안으로 들어가면 시인 기형도의 삶과 문학을 소개하는 조감도가 펼쳐진다. 시인이 작성한 도서 목록표가 살뜰하고, 시인이 쓰던 만년필과 라디오와 시계까지 손때 묻은 유품들이 가지런하다.     



이곳을 지나 본격적으로 시인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연평도에서 태어난 기형도 시인은 경기도 광명시 소화동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문학관에 이곳에 자리한 이유다. 기형도는 공부 잘하고 글 잘 쓰는 꿈 많은 소년이었다. 중학교 3학년 때는 이충무공 탄신 글짓기 대회에서 상장을 받기도 했다. 상장에 적힌 날짜는 1975년 5월 8일. 아직 내가 세상에 나오기 전이다. 고등학교 입학 신체검사표에 붙은 까까머리 소년의 사진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열무 삼십 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 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엄마 걱정>은 내가 가장 좋아했던 기형도의 시다. 집에서 혼자 엄마가 오기만을 기다리는 소년의 조바심과 외로움이 이토록 아련한 언어로 표현될 수 있다니. 그 남다른 감수성이 지금도 기형도라는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힘이 아니겠는가. 이어지는 공간은 관념이 아닌 시인의 통찰과 직접적인 경험을 토대로 새롭게 그려낸 시인의 등단작 <안개>를 텍스트 애니메이션으로 꾸몄다. 이곳을 지나면 시인의 대학 시절 이야기가 펼쳐진다.     


1979년 연세대학교 정법대에 입학해 정치외교학을 전공한 기형도 시인은 전공보다는 문학에 더 많은 애정을 쏟았다. 대학 생활의 중심은 ‘연세문학회’였다. 대학 시절 교내 문학상에 시와 소설로 몇 차례 입상했고, 이때 만난 성석제 등과 교류한다. 방위병으로 입대한 뒤에도 근무지였던 안양에서 ‘수리시’ 동인들과 함께 활동했다.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돼 등단했다. 한 해 전 중앙일보에 입사해 기자로 활동하면서 꾸준히 시를 썼다. 1984년 연세대학교 도서관 대출증의 사진은 우리가 기억하는 시인의 한창 때를 보여준다.     



이야기는 등단 이후 시인의 문단 활동과 신문기자 시절 시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이어지는 공간은 시인의 대표작 중 하나인 <빈집>을 영상과 함께 감상할 수 있게 꾸몄다.   



시인을 추억하는 지인들의 인터뷰와 글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그렇게 일찍 떠나지만 않았다면 우리 말로 쓴 시 세계를 더없이 풍성하게 만들었을 텐데. 시를 필사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있기에 가장 좋아하는 시 <엄마 걱정>을 꾹꾹 눌러 써보았다.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층은 북카페와 도서공간이다. 가만히 앉아 시를 읽고 자기만의 시간을 갖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문학관 기행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문학관 뒤쪽에 조성된 ‘기형도 시길’을 놓쳐선 안 된다. 문학관을 출발해 공원 산책로를 따라 걸으면 곳곳에서 기형도의 시를 만날 수 있다. 기형도 문화공원이라 이름 붙인 이곳은 그러나 큰 도로 옆이라 차량 소음이 커서 시심이 솟아날 만큼 호젓하지는 않다. 방음벽을 세우면 어떨까 싶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기형도의 시를 다시 만났다. 이제 먼지 쌓인 책장에서 시인의 시집을 다시 불러내야겠다.     



그는 어디로 갔을까

너희 흘러가버린 기쁨이여

한때 내 육체를 사용했던 이별들이여

찾지 말라나는 곧 무너질 것들만 그리워했다

이제 해가 지고 길 위의 기억은 흐려졌으니

공중엔 희고 둥그런 자국만 뚜렷하다

물들은 소리 없이 흐르다 굳고

어디선가 굶주린 구름들은 몰려왔다

나무들은 그리고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크고 넓은 이파리들을 가득 피워냈다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일까돌아갈 수조차 없이

이제는 너무 멀리 떠내려온 이 길

구름들은 길을 터주지 않으면 곧 사라진다

눈을 감아도 보인다     

어둠 속에서 중얼거린다

나를 찾지 말라…… 무책임한 탄식들이여

길 위에서 일생을 그르치고 있는 희망이여     



■관람 정보

관람 시간: 화~일요일

관람료: 무료

주소: 경기도 광명시 오리로 268 기형도문학관

전화: 02-2621-8860

누리집: www.kihyungd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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