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남서울미술관. 이름처럼 서울 남부에 있는 몇 안 되는 미술관이다. 사당역을 기점으로 동쪽에 예술의전당이 있다면, 서쪽에는 남서울미술관이 있다. 고풍스럽기 그지없는 이 근대건축물은 제법 긴 역사를 품고 있다.
1901년 조선과 수호통상조약을 맺은 벨기에는 1905년 지금의 서울시 중구 회현동에 있는 우리은행 본점 자리에 벨기에영사관 건물을 짓는다. 1919년 영사관이 충무로로 옮기면서 요코하마 생명보험회사 사옥으로 쓰이다가, 일본 해군성 무관부 관저로 사용됐다. 해방 뒤에는 해군헌병대가 썼다. 1970년 우리은행의 전신인 상업은행이 건물을 사들여 1983년 지금 자리로 옮겨 사료관으로 쓰다가, 2004년 서울시에 영구 무상임대해 그해 9월부터 미술관으로 사용돼 오늘에 이른다. 그 역사적 가치가 인정돼 사적 제254호로 지정됐다.
이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의 벽돌 건물로 일본인 건축가 고다마(小玉)가 설계했다. 붉은 벽돌과 화강암을 이용해 지었는데, 건물의 좌우가 비대칭을 이루는 것이 특징. 기둥부터 창까지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2021년 권진규기념사업회와 유족은 조각가 권진규의 조각, 소조, 부조, 드로잉, 유화 등 141점을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했고, 미술관은 2023년 남서울미술관 1층 전체를 ‘권진규의 영원한 집’이란 이름의 상설전시실로 꾸며 기증에 화답했다. 유족은 권진규의 모교가 있는 강원도 춘천에 미술관을 세우고자 했으나, 중간에 일이 꼬이는 바람에 이미 넘겨준 작품을 다시 찾아오느라 갖은 곤욕을 치렀다. 결과적으로는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었고, 다행히도 서울시립미술관이 권진규를 품었다. 그 자초지종이 조카 허경회 씨가 쓴 권진규의 회고록에 자세히 나온다.
육중한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외양만큼이나 멋스러운 실내공간이 눈앞에 들어온다. 복도 좌우로 작은 전시실 6곳이 권진규를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왼쪽 1전시실부터 시계 방향으로 관람하면 된다.
먼저 1전시실은 ‘새로운 조각’이라는 주제로 권진규의 일본 유학 시절 작품을 선보인다. 권진규는 일본 도쿄에 있는 무사시노미술학교 조각과에서 세계적인 조각가 로댕의 조수였던 부르델의 제자 시미즈 다카시에게 조각을 배웠다. 로댕 – 부르델 – 시미즈 다카시 – 권진규로 이어지는 계보인 셈. 부르델이 로댕과 달랐고, 시미즈 다카시가 부르델과 달랐듯 권진규도 스승과 다른 예술로 나갔다.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는 작품은 권진규가 당시 일본에서는 잘 사용하지 않던 돌을 깎아 만든 1953년 작 <기사(騎士)>. 그해 제38회 니카전에서 특대를 수상한 작품이다. 앞에서 보면 구체적인 형상이 잘 드러나지 않지만, 각도를 달리해서 보면 말 머리와 기사의 두 팔을 한 덩어리 안에 압축한 작가의 뛰어난 기량을 볼 수 있다.
화가 이중섭의 중심 소재가 ‘소’였다면, 조각가 권진규에게는 ‘말’이었다. 말과 연관이 많은 함흥에서 태어난 권진규는 어린 시절의 영향으로 말을 소재로 한 작품을 많이 만들었다. 고려대학교 박물관에서 좋은 작품을 본 기억이 있다. 전시실에서 만난 1953년 작 <마두 B> 역시 제38회 니카전 입선작. 말의 특징이 잘 표현됐을 뿐 아니라 안산암이라는 재료의 특성 덕분인지 고대의 유물을 떠올리게 한다.
2전시실은 권진규가 일본 유학 시절에 만나 사귀고 혼인신고까지 한 오기노 도모라는 일본인 여성과의 관계를 조명한다. 도모는 권진규의 연인이자 동료였으며 훌륭한 모델이기도 했다. 권진규는 일본에서, 한국에서 도모의 두상을 여러 점 만들었다. 하지만 어쩐 일인지 두 사람의 관계는 끝내 이어지지 않았다.
석 점 가운데 1951년 작품은 도모가 세상을 떠난 뒤 권진규의 동생 권경숙 여사가 일본에 건너가 도모의 재혼한 남편으로부터 구매해 찾아왔다. 권 여사는 특별히 더 아끼던 작품은 기념사업회가 아닌 자기 이름으로 미술관에 기증했다. 이어지는 전시공간에선 권진규의 인체 조각 넉 점을 볼 수 있다.
자, 이제 2전시실의 하이라이트를 만날 시간이다. 권진규는 평생에 걸쳐 꽤 많은 자소상을 남겼다. 조각가가 빚은 자기 얼굴,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조각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권진규의 자소상 중에서는 고려대학교 박물관 소장품이 단연 돋보이지만, 두상으로만 표현한 자소상은 작가의 내면세계를 드러낸다는 점에서 무엇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것이 없다. 앞의 두 점과 달리 세 번째 것은 알루미늄으로 제작한 권진규의 마스크다.
복도를 지나 3전시실로 들어서면 작가에게 영향을 준 이미지들이 그의 손끝에서 어떻게 형상화됐는지 보여주는 작품들이 펼쳐진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은 1972년 작 <흰 소>. 어디선가 많이 본 이미지가 아닌가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이중섭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작품이다.
권진규는 1972년 3월 평소 좋아하던 이중섭의 15주기를 맞아 현대화랑이 마련한 유작전을 두 번 관람했는데, 특히 이중섭의 <황소>와 <흰 손>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에는 전시장에서 작품을 사진으로 찍는 것이 허락되지 않아, 갖고 있던 책 속지에 연필로 빠르게 스케치한 뒤 나중에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중섭의 그림을 보는 것과는 또 다른 감흥을 준다.
권진규의 작품 가운데 몇 점 안 되는 부조를 대표하는 것은 1965년 작 <춤추는 뱃사람>이다. 고대의 에게 초기 문명인 키클라데스 문명의 여신상에서 영감을 받은 이 작품으로, 사람은 흙을 작게 뭉쳐서 하나하나 붙이고 배는 직사각형의 도구로 찍어 무늬를 만들었다. 한평생 대상과 존재의 본질을 찾아 예술로 승화하고자 했던 권진규가 문명의 뿌리에서 어떤 영감을 받았는지 보여주는 귀한 작품이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1960년대에 제작한 <고양이 머리>. 정면에서 보면 저게 뭐지 싶지만, 가까이 다가가 위에서 내려다보면 고양이의 얼굴이 또렷하게 보인다. 어린 시절 고향 함흥에서 고양이를 기른 경험 덕분인지 권진규는 1965년경 여동생으로부터 받은 고양이를 기르며 여러 작품을 제작했다.
권진규는 평생 다양한 재료와 기법을 시도했는데, 그 가운데 우리나라 조각가로는 유일하게 사용한 것이 ‘건칠’이다. 옻나무 수액을 모시나 삼베 같은 천에 펴 바른 뒤, 점토나 나무 등으로 만든 원형 위에 붙이고, 그 위에 또 칠을 바르고 말린다. 다 마르면 원형에서 떼어낸 뒤 접합 부분을 수액 바른 천으로 이어 바르고 말리는 기법이다. 석조각이나 목조각과는 다르고, 테라코타와도 다른 질감을 보여준다.
전시장에서 상영되는 영상에서는 권진규의 작품 보존처리를 도맡아온 김겸미술품보존연구소 김겸 소장의 건칠 제작 기법 재연 장면을 볼 수 있다.
4전시실은 권진규의 모델들을 위한 공간이다. 선자, 예선, 경자 세 사람 모두 권진규와 인연을 맺은 이들로서 권진규를 위해 기꺼이 모델이 돼주었다. 여성 두상이나 흉상으로는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된 <지원의 얼굴>(1967)이 워낙 유명해서 권진규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71년경에 제작한 <경자> 역시 건칠 작품으로, 작가가 건칠 자국을 지우지 않고 그대로 살렸다. 예사롭지 않은 표정과 눈빛에서 묘한 긴장감을 읽을 수 있다.
다음 5전시실은 불교의 영향 아래 놓인 작품들을 보여준다. 전시장 가운데 자리 잡은 나무 작품은 사찰의 입구에 선 일주문을 형상화한 작품. 권진규의 작품은 대부분 크지 않은데, 이 작품은 이례적으로 높이 1m가 넘는다. 그 옆으로 나무를 깎아 만든 불상과 화강암을 쪼아 만든 불상, 그리고 석고로 만든 자소상이 놓였다.
마지막 공간은 자료실. 권진규의 동생 권경숙 여사와 회고와 기념사업회를 맡은 조카 허경회 씨가 권진규 아뜰리에를 안내하는 모습을 담은 영상을 볼 수 있다.
이 밖에도 전시실마다 권진규의 삶과 예술을 증언하는 자료들이 함께 놓였다. 1층 공간 전체를 다 더해도 그리 넓다곤 할 수 없지만, 권진규라는 예술가를 기리는 데는 부족함이 없어 보였다. 이 공간이 권진규를 권진규답게 기리는 훌륭한 공간으로 지속성 있게 꾸며지길 기대한다.
전시실을 돌아 나오면서 밀려든 후회 한 자락. 2022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연 권진규의 대규모 회고전을 못 본 것이 한스럽다. 왜 그 전시 볼 생각을 못 했을까. 반성하고,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