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⑰ 국립세계문자박물관 기획특별전 <문자와 삽화>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피렌체를 중심으로 새로운 미술을 난만하게 꽃피우고 있을 때 멀리 북유럽에서는 또 한 명의 위대한 화가가 미술사를 바꾸는 혁신의 길로 나가고 있었으니, 그 이름은 바로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 1471~1528). 화가로는 처음으로 본격적인 의미의 자화상을 그렸고, 자기 그림에 주체적으로 서명하기 시작한 사실은 이미 널리 알려졌다.
지금까지도 수많은 후대 예술가에게 무한한 영감을 주는 이 뛰어난 화가는 특히나 판화에서 일가를 이뤄, 르네상스 시기 최대의 미술사적 업적으로 꼽히는 조르조 바사리의 <미술가평전>에서도 뒤러가 남부 유럽에 판화 제작 기술을 전했음을 입증하는 여러 기록이 보인다. 그런 뒤러의 판화를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 <문자와 삽화: 알브레히트 뒤러의 판화를 만나다>가 인천 송도에 새로 문을 연 국립세계문자박물관에서 막을 올렸다.
뒤러의 판화를 본격적으로 감상하기에 앞서 1부 <문자를 위한 그림>에서는 성서 등 중세 종교 서적을 위해 그려진 삽화의 세계를 소개한다. 사전적 의미에서 삽화(揷畵, illustration)는 도해(圖解)라고도 하며, 특히 서적(사본, 인쇄본 등), 잡지, 신문, 광고 등에서 문장 내용을 보충하거나 강조하기 위한 목적으로 첨부하는 그림을 말한다. 글자뿐인 읽는 책에 보는 즐거움을 더해줬을 뿐 아니라, 글자를 못 읽는 이들에게는 더없이 훌륭한 전달 매체였다.
15세기 중반에 제작된 <기도서>의 한 장면은 천사가 성모 마리아를 찾아와 임신 사실을 알리는 ‘수태고지’를 보여준다. 아치 모양의 창 안에 전형적인 수태고지 장면을 그려 넣고, 그 주위로 꽃 넝쿨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당대에 내로라하는 장인들이 만들었음을 보여준다. 15세기 후반의 <기도서> 역시 수태고지 장면인데, 앞의 그림보다 인물과 건물 묘사가 훨씬 정교하다. 글을 못 읽는 중세 신앙인들도 이 그림만 보면 무슨 내용인지 금방 알아차렸을 것이다.
솜씨 좋은 사람이 일일이 손으로 그리던 시대를 뒤흔들어놓은 것은 인쇄술의 발명이었다. 활자를 만들고 나무판으로 그림을 찍어낼 수 있게 되면서 삽화는 자연스럽게 판화로 발전한다. 15세기 말에 제작된 <뉘른베르크 연대기>를 보면 당시에 이미 목판 인쇄 기술이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음을 알 수 있다. 15세기 후반의 <코베르거 성서> 속 삽화 역시 목판으로 인쇄됐다. 그리고 그 시대에 드디어 걸출한 화가가 등장한다.
이제 관람객들은 뒤러의 방으로 들어간다. 뒤러는 주문받은 장인의 손으로 그려졌던 판화를 예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먼저 목판화. 흔히 <성모 마리아의 생애>, <대수난>, <요한계기록(묵시록)>을 뒤러의 3대 목판화로 꼽는다고. 이번 전시에서 가장 중점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성모 마리아의 생애> 연작이다.
오랫동안 자식이 없었던 요아힘과 안나 부부가 간절한 기도 끝에 딸을 얻어 이름을 마리아라 지었다. 부부는 아이가 하나님(하느님)을 위해 귀하게 쓰이도록 성전에 봉헌했다. 그렇게 성령 안에서 성장한 마리아는 요셉과 약혼한 뒤 성령으로 잉태해 마구간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고, 꿈에서 헤롯왕이 아이를 해치려 한다는 계시를 받고 애굽(이집트)으로 피신한다. 이후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십자가에 달렸고, 이후 성모 마리아는 죽은 뒤 승천해 하늘나라로 간다는 이야기. 뒤러는 이 이야기를 하나하나 목판화로 완성했다.
두 번째 연작은 <예수의 수난>. 예수 그리스도는 전 생애에 걸쳐 끊임없이 크고 작은 수난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그 수난의 끝은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었다. 이번 전시의 주요 소장품들은 독일의 오토쉐퍼박물관 소장품이다. 뒤러의 작품이 국내에서 전시되는 것도 27년 만이라고 한다. 원화 두 점 외에 나머지 연작은 복제품이다.
다음 연작은 <요한계시록(묵시록)>. 예수의 제자 요한은 심판에 대한 계시를 받고 이를 글자로 기록해 남겼다. 오토쉐퍼박물관 소장품이 꽤 많이 나왔다. 요한계시록을 읽고 작품을 감상하면 더 좋을 것이다.
목판화보다 전시된 작품 수는 훨씬 적지만, 뒤러의 동판화도 여러 점 걸렸다. 동판화는 제작 기법상 목판화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섬세한 표현이 가능하다. 흔히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 <기마병(기사와 죽음, 악마)>, <멜랑콜리아 I>을 뒤러의 3대 동판화로 꼽는다고 하며, <아담과 하와>까지 더해 4대 동판화로 간주하기도 한다고.
1504년에 제작된 동판화 <아담과 하와>는 두 점이 나란히 걸렸는데, 이 중 하나는 유일본이라고 한다. 이어 1513년 작 <기마병>과 1514년 작 <서재의 성 히에로니무스>를 만나게 된다. 성 히에로니무스는 지난해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영국 내셔널갤러리 특별전 당시 공개된 이탈리아 르네상스 화가 안토넬로 다 메시나의 <서재에 있는 성 히에로니무스>와 비교해 보면 무척이나 흥미롭다. 성 히에로니무스의 상징이 되는 동물은 사자다. 두 그림에서 사자를 어떻게 묘사했는지 보라.
다음으로 이번 전시의 대표 작품으로 꼽아도 좋을 뒤러의 동판화 걸작 <멜랑콜리아 I>.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게 된 뒤러는 자신이 우울증을 겪고 있다고 확신했고, 이 그림은 그런 화가의 심정을 담은 작품으로 널리 알려졌다. 가까이에서 본 주인공의 눈동자 표현이 이 작품의 성취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지난해 6월 말에 문을 연 국립세계문자박물관이 개관 6개월 만에 누적 관람객 60만 명을 넘어섰다고 한다. 인천의 지역적 특색에 맞춰 전시장의 각 주제 설명문을 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4개 언어로 적어놓은 것이 좋아 보였다. 무엇보다 박물관 건물이 송도 센트럴파크 한쪽에 자연스럽게 스며들게 한 입지와 두루마리 종이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한 건물 구조도 흥미롭다.
1층에서 전시를 보고 2층으로 나오면 공원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된다. 가슴이 탁 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