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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06. 2020

단원 김홍도를 추억하며 쓴 글씨

국립중앙박물관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단원 김홍도는 인물과 영모 등 모든 그림이 보통 수준을 뛰어넘어 입신의 경지에 이르렀다그러므로 글씨에는 별로 마음을 쓰지 않았으면서도 글씨 솜씨는 이처럼 비범한 것이다단원의 아들 양기가 단원과 가장 오래 사귄 사람이 나라고 하며 이 서첩에 한 마디 써줄 것을 간절히 청하였다예전에 밝은 창가 책상에서 (김홍도와서화를 이리저리 펼쳐놓고 육신을 벗어난 듯 화법(畫法)을 의논하던 추억을 생각해보니이런 즐거움을 어찌 다시 누릴 수 있겠는가이 때문에 서첩을 쓰다듬으며 슬퍼하노라자하노인(紫霞老人)이 쓰다.


조선이 낳은 천재 화가 단원 김홍도의 그림은 물론 글씨까지 평할 줄 알았던 사람. 그 아들이 세상을 떠난 부친의 글씨 첩을 만들면서 간곡하게 한 마디 써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생전에 절친했던 사람. 단원과 마주앉아 그림이며 글씨를 펼쳐놓고 예술과 인생을 논했던 사람. 먼저 떠난 이가 못내 그리워 서첩을 끌어안고 슬퍼한 사람.


신위 〈김홍도 서첩에 쓴 신위의 서문〉, 19세기 전반,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이 사람은 바로 김홍도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화가 자하 신위(申緯, 1769~1847)입니다. 김홍도보다 스물네 해 늦게 태어나, 마흔 해를 더 살았죠. 시기가 겹치는 건 아니지만 두 사람 모두 당대 예술계의 큰 어른이었던 표암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비록 신분은 중인과 양반으로 달랐지만, 적어도 예술에 있어서만큼은 신분도 나이도 초월해 서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돈독한 친분을 나누는 사이였던 것 같습니다.


전시회에 가면 생각지도 못했던 뜻밖의 귀한 물건을 만나게 됩니다. 자하 신위는 당대에 시(詩)와 글씨(書), 그림(畵)에 모두 능해 이른바 시․서․화 삼절(三絶)로 불렸습니다.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자하 신위의 둘도 없는 벗이었던 풍고 김조순(金祖淳, 1765~1832)은 자하 신위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습니다.


나의 오랜 벗 자하는 열 살 남짓부터 이미 삼절(三絶)에 이르러서 고금에 그 적수가 없으니하늘이 그 재주를 내신 것이 아닌가자하는 시법(詩法)에서 압록강 동쪽에서 처음으로 묘한 경지를 창조하였으니 누구나 엿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그림 또한 기묘하고 빼어나게 맑으니 운림 예찬이나 석전 심주 같은 사람이 아니면 모두 그 상대가 될 수 없다다만 서예만은 정취가 지극하지만 시와 그림만은 못하다그러나 이는 신위 자신의 삼절 중에 논한 것이지만약 동시대의 다른 인물들과 비교한다면 다른 사람들보다 월등히 뛰어나다.


가장 친한 친구임에도 글씨에 대해서는 제법 냉정한(?) 평가를 잊지 않았더군요. 물론 그 뒤에 나오는 설명이 그런 평가를 상쇄하고도 남긴 합니다만, 아무튼 신위와 김홍도의 인연이 깃들어 있어 그런지 더 관심을 갖고 보게 되는 글씨입니다. 신위는 열네 살에 강세황의 문하에 들어가 주로 대나무 그림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현재 남아 있는 신위의 그림은 대나무를 그린 묵죽화(墨竹畫)가 주류를 이룹니다.


신위 《묵죽도》, 19세기 전반, 비단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이렇게 대나무와 바위를 함께 그린 그림을 죽석도(竹石圖)라고 합니다. 전시장에 걸린 신위의 대나무 그림 가운데 바탕색 때문에 단연 눈에 띄는 작품이죠. 지금 봐도 전혀 시대에 뒤떨어지지 않는 분홍의 화사한 색감이 시선을 끌어 들입니다. 19세기에는 그림에 화사한 멋을 더하기 위해 이처럼 색이 들어간 비단이나 종이에 그림을 그리기도 했답니다. 단정한 기품이 느껴지는 그림입니다.


신위 〈황공망과 미불을 재해석한 그림〉, 1837년, 종이에 먹, 국립중앙박물관


하지만 정작 제 눈은 다른 그림을 향하고 있었으니 마음 가는 대로 쓱쓱 그려낸 것 같은 바로 이 그림이었답니다. 산에도 마을에도 배에도 인적은 없습니다. 그림보다 오히려 더 공을 들인 것 같은 왼쪽 상단 글씨에는 중국의 유명 화가들을 참조해서 수묵화를 그렸다고 적었습니다. 첫 눈 내리는 밤이 오면 누군가를 찾아 훌쩍 떠나고 싶다오. 마치 이렇게 말하는 듯합니다.


(왼쪽) 신위의 글씨 (오른쪽) 김정희의 글씨 (간송미술관)


이번 전시에서 또 하나 주목해볼 작품은 침계(梣溪)라는 현판 글씨입니다. 글씨로 당대 최고의 반열에 오른 추사 김정희(金正喜, 1786~1856)가 쓴 글씨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죠. 안 그래도 전시장에 추사의 글씨를 비교해서 보라고 자그마하게 붙여 놓았더군요. 비슷한 시기에 글씨로 이름을 날린 두 사람이지만, 예술적 지향이나 방법론은 상당히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나란히 사귄 벗을 위해 각자 침계라는 글자를 남겼죠. 이렇게 보면 작품을 감상하는 즐거움도 배가 됩니다.


박물관에서 따로 홍보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을 기념한 이 전시는 말 그대로 소리 소문 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자줏빛 노을에 물들다’라는 부제는 자하(紫霞)라는 호에서 따온 겁니다. 신선의 세계를 물들인다는 자줏빛 노을. 스스로 호를 지어 붙인 것처럼 신위는 그런 신선과도 같은 고고한 삶을 꿈꿨는지도 모릅니다.


전시정보

제목자하 신위 탄생 250주년 기념 서화전 자줏빛 노을에 물들다

기간: 2020년 3월 8일까지

장소국립중앙박물관 서화실

작품글씨그림 등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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