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㉛ 이영학 회고전 <고요의 정원>
한국 현대조각에 진한 발자취를 남긴 조각가 이영학(b.1948). 10년 넘게 개인전이 없었던 까닭에 지금껏 그 존재를 몰랐다. 이영학은 서울대학교 조소과를 나와 이탈리아 로마 예술원과 시립 장식미술학교에서 공부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에서 석사를 마쳤다. 두상을 위주로 한 인물 조각상을 오래 제작했고, 1990년대 이후로는 호미나 가위, 숟가락, 연탄집게 등 일상 용품으로 동물 형상을 조각하기도 했다.
이영학의 본령은 ‘물확’이다. 물확의 확(確)은 절구의 ‘구멍’을 뜻한다. 구멍, 그러니까 홈을 파서 물을 담는 데 쓰는 물건이 바로 물확이다.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정도로 역사가 깊다. 처음에는 절구처럼 실생활 용구로 만들어 쓰다가, 그 안에 물이 담기면 거울처럼 주변 풍광을 아름답게 비추는 특징이 옛사람들에 의해 재발견되면서 뜰을 장식하는 석물로 그 존재가 격상된다. 가을 낙엽 하나만 떠 있어도 깊은 운치를 허락하는 물확은 그 자체로 자연을 담는 그릇이다.
조각가 이영학의 개인전이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열린다. 여러 개인적 사정으로 10여 년의 공백이 있었고, 건강이 안 좋은 상황에서 마련된 회고전이라 그 의미를 얼추 가늠할 수 있게 한다. 2022년 작품이 나온 걸 보면 건강이 좋지 않은 와중에도 작업을 손에서 놓지 않은 것 같다.
전시장의 중심 공간을 차지한 것은 이영학의 조형 세계를 대표하는 <물확>이다. 이영학은 과거 주춧돌이나 바닥 돌로 쓰이다가 버려진 돌덩이를 전국 각지에서 찾아낸 뒤 그 속을 파내고 맑은 물과 이끼, 풀 등을 더해 쓰임이 다한 돌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다. 자연과 인간이 끊임없이 소통하고 교차하는 모습을 재현한 것이다. 작가는 말한다.
“소비하고, 소비되는 모든 것을 만들어내는 일에 지칠 때 당신만의 정원을 가꾸세요. 자연은 소리를 높이는 법이 없지만, 늘 새로운 방식이니 틀림없이 신비를 느낄 것입니다. 늘 두고 보면 어느새 낙천적이 돼요.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지요. 겨울이면 이끼가 눈에 덮이지만, 봄이 오면 또 파랗게 올라옵니다. 그러니 슬플 일도 우울할 일도 없습니다. 그저 정원에서 매일 아침 숨을 들이마시세요. 작은 구원이 되어줄 겁니다.”
작가가 말한 그 ‘작은 구원’에 이끌리듯 평일 낮에도 전시장을 찾는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그리고 대부분 물확에 깊은 관심을 기울이는 모습이다. 실제로 맑은 물을 담았거나 이끼와 풀을 심은 모습을 전시장에서 볼 수 있는데, 직선 또는 곡선이 만들어낸 각양각색의 물확은 마치 돌로 빚은 추상회화 같은 신선함을 준다. 밤하늘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초승달 모양을 한 것도 있다. 돌에 인위를 가했는데도 자연스레 자연을 품었다. 세계적인 건축가 이타미 준은 이렇게 말했다.
“저는 자연 속에서 가장 좋은 것만을 캐내서 작가와 철학 사상을 표현하는 것을 예술의 중요한 단서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인지 이 선생의 작품은 인간의 산물인데도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처럼 보이더군요.”
이영학의 예술은 사람에게서 자연으로 옮아갔다. 13년 동안이나 이탈리아 로마에서 고전적인 인체 조각을 공부했으니 물확 이전 작업의 중심은 사람이었다. 전시장 입구에 선 아기 업은 소녀(또는 엄마)로부터 문화예술계를 비롯한 각계 명사들의 얼굴, 갖가지 인물상과 석상과 불두상에는 오랜 시간 작가가 열정을 쏟아부은 ‘사람’을 향한 관심과 애정이 오롯이 담겼다. 그중에서도 얼마 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이 열린 장욱진 화백의 두상 앞에서 오래 머물렀다. 장욱진은 “저건 내 얼굴이라기보다는 그 자체로 완성된 조각”이라고 했다.
작품 세계의 또 한 축은 오래된 철제 도구와 연장으로 만든 <새> 등이 장식한다. 젓가락이나 연탄집게 등 일상의 도구를 최소한으로 가공해 완성한 이영학의 작품은 ‘재생’의 의미를 환기한다. 실제로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어떤 재료를 어떻게 가공했을지 끊임없이 상상하게 된다. 그 쓰임을 다한 뒤 재활용품으로 던져져 용광로에서 뜨거운 쇳물로 변했을지도 모를 쇳덩어리는 작가에게 구출돼 새 숨결을 얻는다. 작가는 말했다.
“저것들은 그저 물건이 아닙니다. 사람 손끝에서 길들여지면 정이 쌓이고 혼이 고이죠. 그들이 새가 되어 날아가게 해주고 싶어요. 물건으로 살아온 설움을 황홀한 비상으로 풀어주는 거죠.”
전시장 한쪽에는 작가의 작업실이 재현됐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에 띄는 건 소의 두상이다. 작품의 재료는 가위, 더 정확하게는 엿장수 가위다. 특별히 손을 대 가공한 흔적 없이 그 자체로 생명체의 얼굴을 이뤘다. 이 장면은 2009년 두가헌갤러리 전시에서 작가가 대중에게 선보인 것으로, 당시 전시장과 이영학 작가의 작업 모습이 KBS 9시 뉴스에 방영됐다. KBS 아카이브에서 확인한 이영학 작가의 뉴스 인터뷰는 두 건이다.
화랑가에 울리는 ‘워낭소리’ (KBS 뉴스9 2009년 2월 15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1722841
돌과 벽돌 (KBS 뉴스광장 2000년 8월 30일 방송)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1106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