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㉞ 수원시립미술관 <이길범: 긴 여로에서>
이길범(1927~)은 수원을 대표하는 한국화가다. 수원을 중심으로 활동했기에 중앙 화단에는 이름이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열일곱 나이에 당대 한국화단의 거목이었던 이당 김은호 문하에 들어가 6년여 동안 그림을 배웠다. 이당의 화실 낙청헌에서 그림을 배운 이들의 모임 후소회(後素會) 핵심 일원으로 전시에 꾸준히 참여했다.
6․25전쟁이 끝난 뒤엔 부산 영도의 근대 도자기회사 대한도기에 들어가 도안을 그렸고, 고향 수원으로 돌아와선 대한교육연합회에 들어가 잡지 『새교실』에 삽화를 그렸다. 직장 생활을 마친 1980년대 들어 수원 중동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본격적으로 그림에 몰두했다. 1982년에 수원 최초의 한국화 동인 모임인 성묵회를 꾸려 수원 미술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이길범은 표준영정 작업으로 이름을 알렸다. 1988년 <정조> 표준영정을 시작으로 <태조 왕건>(1998)과 <조심태>(2011)까지 세 분의 표준영정을 제작했다. 이당의 제자들이 정부 표준영정을 도맡아서 제작한 것을 생각하면 스승에게서 배운 인물화 실력이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화가가 97살이 된 올해 드디어 생애 첫 미술관 전시가 마련됐다.
전시는 화가의 작품세계를 화목별로 나눠 보여준다. 첫 번째는 <영모화조>, 동식물 그림이다. 미술관 소개자료를 그대로 옮기되 일부 표현을 다듬었다.
이길범이 그린 영모화조화는 인물화와 산수화보다 비중은 작지만, 가장 의미 있는 소재다. 작가의 1949년 등단작은 온후한 봄볕 아래 노니는 오리의 모습을 담은 것이었고, 1981년 수원백화점에서 열린 첫 번째 개인전에 소개된 대표작도 꿩과 까치를 그린 영모화였다. 스승인 이당 김은호의 낙청헌 화숙(畵塾)의 작화 경향은 채색화풍의 화조화와 인물화로 이길범이 시적 정취가 묻어나는 서정적인 작품을 전개하는 바탕이 되었다. 이번 전시에서는 작가의 가장 이른 시기 작품인 <오수(午睡)>(1948)를 시작으로 꽃과 나무, 새가 한데 어우러진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이길범은 영모, 화조, 인물 등 다양한 소재를 소화하며 작품세계를 구축했지만, 그의 화업의 시작은 인물채색화이다. 작가는 근대기 마지막 어진 화가였던 김은호의 화풍을 본받아 수련하는 과정을 거치며 정밀한 필치와 고아한 채색기법을 익혔다. 1988년부터 이길범은 세 차례에 걸쳐 정부 표준영정 제작 화가로 참여하였고, 그 중 <정조> 표준영정은 대중에게 가장 각인된 작가의 대표 인물화다. 아울러 작가는 인물과 동물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상상력이 가미된 새로운 작풍을 선보이기도 하는데, 이는 오랜 시간 삽화가로 활약한 이길범의 독특한 구성 방식이다.
이 그림의 주인공 조심태(趙心泰, 1740~1799)는 조선 후기 영․정조대의 무관이다. 충청도병마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거쳐 1789년에 수원부사로 임명돼 정조의 명으로 사도세자의 무덤인 현륭원(顯隆園)을 옮겨와 조성하는 일을 맡았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794년 승격된 수원부유수로 다시 등용돼 수원화성 공사를 관리 감독하며 정조의 신임을 받았다.
표준영정 제작을 맡은 이길범은 조심태의 후손 100여 명의 두상을 조사한 자료를 참고하는 등 고증에 힘을 쏟았고, 2011년 정면을 바라보는 무관복 차림의 조심태 영정을 완성했다.
흥미로운 것은 국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 자료에서 조심태의 초상화 두 점이 확인됐다는 사실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된 고서 <문신초상화첩>에서 채색본, <문인초상일괄>에서 초본이 확인된 것. 초상화가 발견됐으니 표준영정의 존재 의미는 퇴색했지만, 이길범이라는 화가가 최근에 제작한 인물화로서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수원이라는 도시의 역사를 만든 정조와 조심태의 표준영정을 수원 출신의 화가 이길범에게 그리게 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결정이었을 것이다. 이 또한 미술관의 작품설명을 옮겨 다듬는다.
조선 22대 왕 정조(正祖)의 어진은 작가가 처음 참여한 표준영정으로 각별한 의미를 띤다. (중략) 이길범은 익선관을 쓰고 오조룡을 금실로 수놓은 홍룡포를 착용한 정조의 모습을 그렸다. 극세필의 세밀한 붓질과 사실적인 묘사는 용상에 앉은 정조의 위엄 있는 표정을 배가한다. 상단 가장자리에는 ‘정조대왕 어진’ 표제가 있고, 좌측 아래에는 어진을 봉안한 날짜와 화가의 이름이 보인다.
인물화 가운데 여인의 모습을 담은 그림 석 점이 눈에 띈다. 가장 이른 시기인 2003년 작 <청아(淸雅)>는 제목 그대로 은은하게 핀 연꽃과 자연스럽게 어우러진 여인의 모습을 수수하고 담담한 색채로 그려낸 작품이다. 2016년 작 <기쁜 날>은 꽃다발을 한가득 품에 안고 환하게 웃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는데, 색을 많이 쓰지 않았는데도 은은한 색감이 도드라질 뿐 아니라 평화롭기 그지없는 수수한 미소가 더없이 사랑스럽다.
제작연도가 확인되지 않은 <독서>는 여인이 입은 파란 옷이 도드라지는 작품이다. 가장 최근인 2017년 작 <여심>은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지는 여인의 모습을 담았다. 다음은 산수풍경이다.
이길범의 산수풍경화는 수원 작가로서의 정체성이 가장 뚜렷하게 나타나는 장르다. 작가는 실제 풍경을 스케치와 사진으로 옮겨온 뒤 완성하거나 실제 장소의 인상적인 부분들을 재조합하고 회화화하는 방식을 보여준다. 그 가운데 이길범이 가장 즐겨 그린 소재는 수원화성이다. 옅은 먹과 청색의 청량한 어우러짐이 특징인 <수원화성>(연도미상)은 현대적 감각으로 변모한 작가의 화풍이 드러나는 대표작이다. 특히 이번 전시에서는 먹의 자연스러운 번짐과 금분을 활용하는 등 이길범 특유의 작풍이 돋보이는 산수풍경화를 만날 수 있다.
전시장에 나온 산수화로는 가장 이른 시기인 1982년 작 <산>은 먹의 농담을 활용해 산세를 표현한 기법과 더불어 화면을 거의 꽉 채운 구도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전시장에 설치된 그림 가운데 가장 최근 작품은 화가가 2018년 금강산 관광을 다녀와 완성한 <해금강의 봄>이다.
희고 깔끔한 벽에 그림을 거는 대신 무대처럼 꾸민 공간에 설치미술처럼 그림을 배치한 것이 이채롭다. 그림을 꼭 벽에 걸란 법이 있는가. 그림 한 점 한 점이 마치 무대에 올라선 주인공처럼 느껴지니, 생애 첫 미술관 전시를 연 화가의 감개가 어떻겠는가. 전시장 가운데 화가의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아카이브 자료까지 살뜰하게 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