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㊿ <위대한 유산: 현대미술로 보는 우리 문화유산>
세상에 하고많은 작가가 있다지만, 내게 의미 있는 건 내가 아는 작가다. 직접 만나서 인터뷰하고 작품을 화면에 담아 뉴스에 소개한 작가는 그 뒤에도 작품이 전시에 나오면 자연스럽게 찾아보게 된다. 이 전시에 참여한 작가 12명 가운데 강홍구, 김용관, 황선태 작가가 그러하다. 아는 작가의 작품을 만나면 반갑다.
■[주말&문화] 그 섬에는 ( )가 있다…‘고향 상실’의 시대에 건네는 선물 (KBS 뉴스9 2023.04.01)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640749
■[주말&문화] 정직한 기다림의 미학…건축사진, 예술이 되다 (KBS 뉴스9 2023.07.0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18939
■빛으로 그려낸 세계…팍팍한 일상을 위로하다 (KBS 뉴스9 2022.11.1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5605117
하지만 세상에는 내가 모르는 작가가 훨씬 더 많다. 아직 나의 눈길이 미처 가닿지 않은 작가들의 좋은 작품을 만나면 가슴이 뛴다. 이 전시에서 그런 작가 몇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이 또한 전시를 보는 큰 즐거움이자 보람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우리의 소중한 문화유산을 담은 현대미술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이 전시에서 나는 다음과 같은 작품들을 만났다.
한겨울 흰 눈에 덮인 종묘 정전의 전경을 담은 사진이다. 국내 최대 목조건축물의 파노라마를 한 화면에 담기 위해 가로로 긴 구도를 취했다. 자세히 들여다보면 한 번에 포착한 장면이 아님을 금방 알 수 있는 것이 월대와 건물의 소실점이 다르다. 작가는 2년에 걸쳐 겨울에 눈이 오면 새벽 일찍 종묘를 찾아 조금씩 수평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사진을 찍었다. 이렇게 촬영한 사진 200여 장을 컴퓨터로 정교하게 짜 맞춰 완성한 것이 바로 이 작품이다. 작품 제목은 ‘영혼이 다니는 길’을 뜻한다. 미술관에 걸린 작품 설명은 이렇다.
“한 장의 사진 안에 시간의 흐름에 따른 변화와 공간의 깊이를 담아냈다. 이는 실제로 존재하는 풍경이지만, 동시에 가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이 작품은 가로 길이가 긴 목조건축물인 정전의 특성을 극대화하여 창작되었다. 정전의 이러한 건축적 특징은 작품에 깊이와 시간의 연속성을 부여하며, 한국 전통건축의 미학적, 구조적 요소를 탐구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중근 작가의 또 다른 작품은 경남 양산 통도사 대웅전 천장을 담았다. 앞서 종묘 작업과 마찬가지로 사진 수백 장을 찍은 뒤 200여 장을 추려 컴퓨터 그래픽으로 섬세하게 연결해 완성했다. 공간의 특성에 맞는 작업 방식을 작가 스스로 고안한 것이다. 인간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이 장면은 대상의 실체를 총체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한다. 섬세하게 조각된 천장 구조의 공간성에 빛바랜 단청이 상기시키는 시간성까지 담아낸 이중근의 작품은 그래서 특별하다.
재료가 재밌다. 나무 패널에 플라스틱 단추와 종이 단추를 핀으로 박아넣고 비즈로 장식했다. 창덕궁 전각의 양쪽 끝을 하늘로 한껏 들어 올려 조형에 변화를 줬고, 단청의 꽃무늬를 나무에 핀 꽃으로 연결해 흰색으로 표현된 화면에 색채감을 부여했다. 단추의 개수를 일일이 세기 곤란할 만큼 작가의 고된 노동을 짐작게 한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게 된다. 미술관의 작품 설명은 아래와 같은데, 과도한 의미 부여가 굳이 필요했을까 싶다.
“다양한 크기와 색상의 단추들은 인간의 복잡한 삶과 사회적 다양성을 상징한다. 왜곡된 건축 구조물 이미지는 현대 사회의 인간 욕망과 허상을 비판적으로 드러내며, 이를 통해 물질적 가치에 집착하는 현대인의 삶에 대한 성찰을 유도한다.”
쌀 알갱이도 아니고 밥풀이라는 흔치 않은 재료로 만든 작품이다. 캔버스에 바탕색을 칠한 뒤 커다란 사각형 틀을 만들고 그 안에 훈민정음 해례본 글자를 밥알로 그려냈다. 밥알을 몰딩해서 핀셋으로 하나하나 붙였으니 이 또한 수공예적인 작업 과정의 산물이다. 누구나 차별 없이 우리 말글을 쓸 수 있어야 하고, 한국인이라면 공히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 작품 설명은 다음과 같다.
“작가는 밥알 하나하나를 섬세하게 다루면서 훈민정음 창제에 담긴 숭고한 가치를 예술로 표현했다. 밥알 하나하나에 담긴 작가의 정성과 노력은 훈민정음 창제에 담긴 조상들의 꿈과 염원을 상징한다. 이 작품은 한국인의 밥을 사용하여 훈민정음의 문자를 형상화함으로써, 한글의 보편적 가치와 한국인의 삶이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돈아 작가의 올해 신작 두 점은 렌티큘러 작품이다. 보는 각도에 따라 두 가지 장면이 교차한다. 이 작품은 천년고도 경주를 대표하는 고분군을 배경으로 석조 유물 첨성대가 중심에 두고, 기하학적 도형이 떠 있는 하늘을 낮과 밤으로 표현했다. 수없이 많은 낮과 밤을 지나오도록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는 첨성대의 의미와 가치를 새롭게 바라보게 한다. 전시 설명을 읽어보자.
“낮과 밤의 대조적인 이미지는 과거의 유산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나아가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관람객의 시선 각도에 따라 하늘의 이미지가 변화하는 것은 천문 관측의 중요성과 시간의 흐름 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첨성대의 가치를 강조한다. 작가는 첨성대를 통해 과거 인류의 지혜와 업적을 기리고, 현재의 가치를 되새기며, 미래를 향한 희망을 제시한다.”
사람 키보다 더 큰 거대한 김치를 기념비화한 이색적인 작품이다. 전시에 김치가 등장한 까닭은 한국의 김장 문화가 2013년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됐기 때문. 한국인에게 김치가 갖는 의미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울 정도로 근원적이다. 김치 없이는 살 수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작가는 한국인의 정체성과도 같은 음식인 김치를 기념비로 만들었다.
“한지의 구김과 특성을 이용한 한지 캐스팅 기법과 염료를 사용하여 실제 김치의 질감과 색감을 똑같이 재현함으로써,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한다. 이 과정에서 미각과 후각에 호소하는 김치의 특성이 시각적인 이미지로 전환되어, 보는 것만으로도 김치의 맛과 식감을 느낄 수 있게 된다. 일상 속 김치와 다르게 거대화되고 예술화된 김치는 강렬한 시각적 충격을 주고 그 가치를 재평가하게 만든다.”
수제 비누와 같은 투명한 질감과 색감을 한 돌덩이를 쌓아 만든 탑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고대인의 무덤이었던 고인돌에서 영감을 얻은 결과물이다. 지금도 산에서 사는 사람들이 더러 돌탑을 쌓아 올리는 걸 보면, 인류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쌓기’라는 행위에는 단순한 노동이자 기능 이상의 의미가 깃들어 있음을 알게 된다. 재료와 표현방식의 특성 덕분에 거듭 들여다보게 하는 힘을 지녔다.
“이는 청동기 시대 주민의 분묘축조 방법과 원시 종교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인 고인돌의 제작 과정과 의미를 상징적으로 표현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대의 고인돌이 가진 조형적 아름다움과 고대인의 건축 기술을 현대적인 재료와 기법으로 재창조함으로써, 예술이 과거와 현재를 잇는 문화적 수단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곤충의 시점’으로 잘 알려진 주도양 작가의 작품이다. 이곳은 부석사 무량수전. 전각 내부를 350도 촬영한 뒤 사진 70여 장을 이어붙여 하나로 압축된 화면을 만들었다. 안도 없고 밖도 없이 무한 반복하는 무늬는 생의 윤회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실점 위에 가부좌 틀고 앉은 부처는 그 모든 것으로부터 초탈한 모습이다. 사진을 바짝 당겨 보면 부처님 앞에 명패처럼 “사진 찍지 마세요”라는 문구가 보인다. 자세히 봐야 보이는 법이다.
“작품 제목인 공(空)은 ‘비어 있다’는 뜻으로 카메라를 은유한다. 변화무쌍한 세상을 담는 영상 이미지는 결국 속이 비어 있는 어두운 방(camera opscura)에서 탄생한다. 카메라가 본질적으로 비어 있는데도 이미지를 채우는 장치라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 철학에서 중요한 개념인 공(空)과 연결되어, 사찰의 영적 공간과 불교의 교리를 통해 영원과 본질을 탐구하려는 작가의 철학적 사색을 드러낸다.”
자, 이제 아는 작가들의 작품이다. 지난해 사비나미술관 전시에서 소개된 바 있는 강홍구의 작품은 제목처럼 작가의 고향인 전남 신안의 갯벌을 촬영한 사진에 그림을 더한 것이다. 신안 갯벌은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이다. 작가가 갯벌에서 뛰어놀았을 어린 시절 추억을 떠올렸는지도 모르겠다. 갯벌은 수많은 생명을 살게 하는 터전이다.
건축사진가 김용관의 작품은 합천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를 사진에 담은 것이다. 오른쪽 사진의 소실점은 화면 정중앙으로 모인다. 가운데 통로를 중심으로 왼쪽 대장경판과 오른쪽 대장경판이 바라보는 시선이 엇갈린다. 바짝 당겨서 보면 저 멀리 복도 끝에서 구원처럼 한 줄기 빛이 번쩍이며 장경판전 안으로 스며든다.
왼쪽 사진의 소실점은 화면 가운데에서 살짝 왼쪽으로 치우쳐 있다. 장경판전의 외벽과 내부 사이의 통로에 서면 내부에 빼곡하게 꽂힌 대장경판과 밖에서 스며드는 빛이 마주 보고, 바닥에는 빛의 띠가 만들어낸 무늬가 규칙적으로 그려진다. 장경판전에 어울리는 무늬가 창에도 있고, 바닥에도 생겨났다. 아무 보정이나 꾸밈없이 작가의 시선으로 포착한 장면이다.
황선태 작가의 작품이 이 전시에 소개된 것은 창밖으로 펼쳐지는 배경 때문이다. 흔히 ‘빛이 드는 공간’으로 명명된 황선태의 작품은 특정한 장소를 보여주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이 작품에 보이는 집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공간이다. 그러니 창밖으로 저런 풍경이 보일 리도 없다. 하지만 작가는 이례적으로 창 너머에 안동 하회마을의 실제 풍경을 넣었다. 허구와 실재가 만나 잔잔한 판타지를 만들어낸다.
미술관 3층에 작품, 4층에 유네스코 세계유산 아카이브 공간이 마련됐고, 2층에서는 눈물을 주제로 한 전시 <호곡장: 눈물의 힘>이 같은 기간에 열린다. 안창홍 작가의 신작을 처음으로 공개하는 것을 비롯해 국내외 작가 9명의 작품 58점을 선보인다. 3층과 4층을 먼저 본 뒤에 2층 전시를 관람하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