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칠고 조악한 ‘모난 돌’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개성으로 인정해 포용해주려는 너그러운 자세가 우리에게는 필요하다. ‘창조적 반항’이나 ‘엉뚱한 상상력’은 예술뿐만 아니라 학문의 세계에도 여전히 적용되는 소중한 개념이기 때문이다.”
마광수라는 이름에 끈덕지게 붙어 따라다니는 ‘음란’과 ‘외설’이란 꼬리표. 어쩌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낙인으로 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죠. 마광수라는 한 작가 덕분에 우리 사회가 신봉하는 예술의 자유, 표현의 자유에 얼마나 큰 결함이 있는지를 똑똑하게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모두 마광수 교수에게 빚을 지고 있는 게 아닐까.
전시장 모니터 안에서 마광수는 말합니다.
“열 사람의 일반 독자가 좋아하더라도 한 사람의 기득권 문화인이 싫어하게 되면 작가가 곧바로 매장돼버리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라는 사실을 ‘즐거운 사라’ 사건을 통해 절감했다.”
예술을 옳고 그름의 기준으로 판단하기 시작하는 그 발상의 뿌리는 전체주의입니다. 불과 몇 년 전에도 비슷한 일은 되풀이됐습니다. 예술 작품에 그르다는 낙인을 찍고 십자포화를 쏟아부어 마녀사냥을 일삼는 말도 안 되는 작태들이었죠. ‘불온’하다고 판정된 책들이 강제 수거되고, 멀쩡한 그림이 전시장에서 철거됐습니다. 불과 몇 년 전이었습니다.
《즐거운 사라》로만 기억되기 쉬운 마광수 교수는 다채로운 재능의 소유자였습니다. 대학에서 연구하고 가르치는 국문학자였고, 꽤 많은 시와 소설을 남긴 작가였으며, 뜻밖에도 기성 화가 못지않게 왕성하게 그림을 그린 화가였습니다. 2017년 마 교수가 세상을 떠난 뒤 모교인 연세대학교에 기증된 유품들로 고인의 넋을 기리는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화가 마광수의 예술세계를 압축하는 핵심 낱말은 ‘즉흥성’입니다. 마 교수는 생전에 이런 말을 남겼죠.
“그림을 그릴 때 내가 가장 중점을 두는 것은 동심과 같은 ‘즉흥성’이다.”
전시장에 걸린 그림들은 마 교수의 이 말에 정확하게 부합합니다. 머리를 쥐어 뜯어가며 구도를 잡고, 떨리는 손으로 세심하게 색을 고르고, 숨을 꾹 참아가며 선을 그어나가는 태도와는 거리가 멀죠. 마음 가는 대로, 손 가는 대로 쓱쓱 그려나간 그림들은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의 솜씨로 보아도 좋을 정도입니다.
마 교수 그림의 가장 큰 특징은 글과 짝을 이룬다는 점입니다. 마 교수가 발표한 시나 소설의 상당수는 같은 제목의 그림으로도 꽤 많이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전시장에 가면 그림과 책을 나란히 선보이는 공간이 여럿 있습니다. 전시장 입구에 인쇄된 마 교수의 글을 읽어 보면 시(詩), 글씨(書), 그림(畵)을 일치시킨 옛 문인들의 전통을 진지하게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요즘 와서는 문학과 미술 간의 거리가 점차 멀어져가고 있다. 나는 그런 간격을 좁혀보려고 했다. 매번 그림을 그리면서 느끼는 것은, 내 작품들이 무슨 재료를 써서 그렸든 모두 다 문인화(文人畵)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나의 미술 작업을 외도(外道)라고 야단치지는 말아줬으면 좋겠다.”
실제로 화가로서 마광수의 이력은 웬만한 전업 화가 못지않더군요. 1991년 서울 대학로 갤러리에서 첫 그룹전에 참여한 이래 2015년까지 21차례나 개인전이나 그룹전을 열었습니다. 심지어 뉴욕에서 연 개인전도 두 차례나 있었고요. 특히 2005년부터는 1, 2년 간격으로 꾸준히 그림 작업에 몰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재료의 다양성도 놀라움을 줍니다. 캔버스에 유채물감이나 아크릴물감으로 그린 유화는 말할 것도 없고 종이에 수채물감이나 파스텔, 먹으로 그린 그림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 석판화 작업까지도 남아 있습니다. 월간 미술잡지 《미술세계》에 1년 가까이 <마광수의 그림읽기>라는 칼럼을 연재하기도 했더군요. 그림에 대한 마 교수의 애정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나는 예술이라는 단어에 가장 잘 부합하는 장르가 미술이라고 생각한다.”
애초 지난해 끝날 예정이었던 전시가 3월 말까지 연장됐습니다. 대학 박물관 전시라는 점만 감안한다면 화가 마광수의 회화 세계, 나아가 다재다능한 예술가였던 마광수의 폭넓은 예술세계를 만나볼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기회입니다. 마광수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마광수가 곧 그림이요, 그림이 곧 마광수임을 깨닫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