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62) 칸옥션 6월 경매 주요 출품작 프리뷰
여기 조선시대 문신 초상화 4점이 있다. 대한제국 시기에 철도사업을 하러 우리나라에 온 미국인 해리 보스트윅(Harry Bostwick)이 고종황제에게 직접 하사받은 것이다. 보스트윅은 헨리 콜브란(Henry Collbran)과 함께 경성 일대 전력공급 사업권을 따내 한성전기회사(漢城電氣會社)를 설립하고, 전차선 사업 허가와 투자를 받아 서대문에서 종로, 동대문을 거쳐 청량리에 이르는 약 8km 길이의 전차선을 설치했다. 한국에 머물 당시 보스트윅은 고종황제로부터 그림과 공예품 등 다양한 미술품을 받았다.
경매에 출품된 초상화 넉 점은 모두 18~19세기에 제작된 반신상으로, 오사모(烏紗帽)에 관대를 하고 분홍색 시복(時服)을 입은 모습으로 그려졌다. 절제된 필선과 은은한 색채로 얼굴의 주름과 수염 등을 포함한 개개인의 특징을 세밀하게 묘사했으며, 사실적으로 정직한 표현법이 특징이다. 이 네 점은 본래 첩으로 제작됐다가 대한제국 시기에 미국으로 반출된 이후 액자로 다시 꾸며졌다. 일부 초상화의 뒷면에는 해당 인물의 이름과 관직이 한자로 적혀 있다.
맨 왼쪽부터 첫 번째 분은 월호 조영국(趙榮國, 1698∼1760)으로 농업 분야에 해박해 『농서총론(農書總論)』이라는 뛰어난 저작을 남겼다. 두 번째 분은 가헌 김한철(金漢喆, 1701~1759)로 함경도관찰사, 대사헌, 우참찬 등을 지냈다. 세 번째 분은 지암 이철보(李喆輔, 1691~1770)로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과 각 조의 판서를 두루 지낸 인물이다. 마지막으로 맨 오른쪽 분은 담와 심성진(沈星鎭, 1695~1778)으로 이조참판, 홍문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들은 1691년에서 1701년 사이에 태어나 관직 활동을 한 시기에 겹치고, 지암 이철보와 담와 심성진은 장수한 덕분에 말년에 기로소에 드는 영예를 얻었다. 네 분 모두 다른 초상화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월호 조영국의 초상이다. 두 눈이 바깥으로 살짝 벌어져 있다. 두 눈이 똑바로 정렬되지 않은 사시(斜視)다. 그래서 이 초상화를 보면 조영국은 사시였구나 하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조선의 초상화가 이렇게 사실적이었다. 조선의 초상화가는 눈에 보이는 그대로, 터럭 하나 바꾸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정확하게 그렸다. 철저한 원리주의자였던 것. 만약 저 사시를 교정해서 반듯하게 그렸다면 조영국을 아는 다른 사람들은 ‘에이, 눈을 다르게 그렸구먼’ 하며 혀를 끌끌 찼을지도. 그러니 복잡하게 생각할 것도 없이 그냥 똑같이 그리면 아무 탈이 없다. 다만 당사자는 혹 그게 불만일 수도 있지 않았을까. 영화 <해바라기>의 명대사를 빌리면, 꼭 그렇게 똑같이 그려야만 속이 후련했냐?
다음으로 주목해봐야 할 출품작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 탁본(北漢山新羅眞興王巡狩碑 拓本)>이다.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는 신라 진흥왕이 척경(拓境)과 순행(巡行)을 기념하고자 북한산 비봉 정상에 설치한 비석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진흥왕의 순수비 4기 중 하나다. 오랜 세월 잊혔다가 1816년 추사 김정희가 직접 비봉 정상에 올라 비문을 해독하고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임을 밝혀냈다. 김정희가 비석 측면에 동리 김경연(金敬淵, 1778-1820)과 함께 방문해 비문을 판독했다는 내용을 새겼고, 이듬해인 1817년에는 운석 조인영(趙寅永, 1782-1850)과 함께 다시 찾아 추가로 글자를 해독하고 그 사실을 옆에 또 새겼다. 김정희는 비석의 탁본을 떠서 자신의 글 <진흥이비고(眞興二碑攷)>에 싣고, 청나라 친구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40여 년 뒤 이제현(李濟鉉)이라는 인물이 비석을 찾아 김정희가 새긴 글씨 사이에 자기 글씨를 또 새겨 넣었다.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이것은 신라 진흥대왕(진흥왕)의 순수비이다.
병자년(1816) 7월 김정희와 김경연이 와서 읽었다.
정축년(1817) 6월 8일 김정희와 조인영이 함께 와서
남아있는 글자 68자를 해독하였다.
기미년(1859) 8월 20일 용인사람 이제현
1972년 풍화와 붕괴 우려로 당시 문화공보부가 비석을 떼서 경복궁 종합박물관 수장고로 옮겼고,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 신라실에 전시·보관하고 있다. 출품작은 북한산신라진흥왕순수비를 탁본한 것으로, 비석의 주요 내용이 담긴 정면과 김정희와 이제현이 글씨를 새긴 측면 부분이 함께 전한다.
이 밖에 글씨로는 조선 말기의 독립운동가 이시영 선생이 중국 당나라 말기 시인 사공도(司空圖, 837-918)의 「이십사시품二十四詩品」 중에서 ‘세련(洗練)’의 내용을 쓴 <시고>(1910)가 주목된다. 이시영 선생의 작품이 극히 드문 데다 망명하기 전에 쓴 글씨는 전하는 것이 거의 없어 대단히 귀한 자료다. 또 하나, 2008년 노무현 대통령이 직접 서명한 책 <그에게서는 사람의 향기가 난다>가 눈길을 끈다. ‘사람 향기 나는 노무현 2008’이라고 적혀 있다.
회화로는 소치 허련의 그림으로는 보기 드문 대작으로 꼽히는 <산수>, 단원 김홍도의 아들로 역시 이름 있는 화가였던 긍원 김양기의 <괴석과 잠자리>, 해부 변지순의 <산수>, 서암 김유성의 <기려산수>, 신원 이의양의 <화조>, 작자는 알 수 없지만 유려하고 섬세한 필치가 일품인 <포도>, 역시 작자는 모르지만 뛰어난 필치가 돋보이는 <운룡 雲龍>, 호렵도로는 꽤 높은 수준을 보여주는 8폭 병풍 <호렵도팔곡병>, 소치 허련의 넷째 아들 미산 허형의 10폭 병풍 <월매일지병 月梅一枝屛), 소정 변관식의 품격 있는 산수화 <춘강시의 春江詩意>, 운보 김기창이 1966년 소전 손재형에게 그려준 <비파 枇杷>, 운보 김기창이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를 방작한 두 점 등이 주목된다.
이번 경매에는 특히 나비 그림 넉 점이 나란히 출품돼 비상한 관심을 끈다. 꽃과 나비는 예로부터 그림의 단골 소재였다. 옛날 사람들은 나비가 장수를 상징한다고 생각하여 나비 그림을 애호했는데, 특히 부귀를 상징하는 모란과 함께 그려 부귀장수를 기원하기도 했다. 18세기 이후에는 양반계층 사이에서 꽃을 기르는 취미가 유행하여 자연스레 꽃을 향한 관심이 높아졌고, 이와 함께 나비 그림 또한 크게 유행하기 시작하여 많은 화가가 꽃과 나비 그림을 남겼다. 19세기에 접어들며 호접도를 그린 화가들이 대거 등장했다. 장식적인 화조화나 초충도 등 회화 수요가 많아지는 사회적 분위기 속에서 양반부터 서민층에 이르기까지 나비는 매우 인기 있는 소재로 사랑받았다.
일호 남계우(南啓宇, 1811~1888)에 의해 정형화된 나비 그림은 이후 이당 이경승(李絅承, 1862~1927)과 ‘정나비’로 불리는 석하 정진철(鄭鎭澈, 1908~1967)이 조선의 나비 그림 계보를 이어 해방 이후까지 활동했다. 정진철의 아들 석운 정은영(鄭恩泳, 1930~1990) 또한 아버지의 뒤를 이어 나비 그림을 그렸다. 출품작은 남계우의 <괴석호접 怪石胡蝶>, 이경승의 <괴석호접 怪石胡蝶>, 정진철의 <화접 대련 花蝶 對聯>, 정은영의 <화접 花蝶> 등 넉 점이다.
근현대 작품으로는 천경자의 <도라지꽃>, 박봉수의 <신혼>, 강환섭의 <소와 아이>, <귀로>, 이종상의 <원형상 등 판화 6점>, 안상철의 <석류>, 이남호의 <무고위선 撫古爲禪> 등이 새 주인을 찾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