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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un 24. 2024

이것은 사자의 말이 아니다. 사람의 말이다.

석기자미술관(64) 김남표 개인전 <UNMASK>


이것은 사자의 말이다.     


초원에 짙은 어둠이 내려앉았다. 밤이 온 것이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나는 가만히 웅크려 엎드린다. 대지에는 아직 낮의 온기가 남아 있다. 아니, 내 몸의 온기가 땅에 전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삶이 혼곤하다. 며칠째 먹은 거라곤 다른 짐승들이 살이란 살은 죄다 발라 먹고 남은 앙상한 뼈에 붙은 실낱같은 살점 몇 가닥이 전부다. 내 입가에 묻은 붉은 피만 보고 속단해서는 안 된다. 굶주림은 나의 운명. 이제 나는 늙었다. 늙은 사자는 포효하지 못한다. 사냥감들은 나를 비웃듯 재빠르게 달아난다. 나는 달리지 못한다. 배고픔은 나의 숙명. 이제 나는 지쳤다.     


무리의 젊은 우두머리가 나를 들판으로 내몰았다. 한때 나는 이 초원의 왕이었다. 하지만 나는 늙고 병들었다. 젊고 힘센 수컷이 무리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나는 달리지 못한다. 사냥에 나선 암컷들은 내게 고깃덩이를 나눠주지 않았다. 배가 너무 고파 가만히 무리에 끼어들기라도 하는 날엔 젊은 사자들의 벼락같은 으르렁거림이 날아든다. 사나운 발톱이 내 늙은 살가죽을 할퀸다. 나는 무력하다. 입맛을 쩍쩍 다시며 발걸음을 돌린다. 이 광활한 초원에서 나는 외롭다. 나는 늙은 사자다. 늙은 사자는 포효하지 못한다. 나는 왜소하다. 뭇짐승들의 왕이었던 시절이 언제였던가. 나는 이렇게 조용히 사라지고 말 것이다. 긴 밤이 서서히 물러가고 초원의 저편에서 시뻘건 해가 고개를 내민다. 몇 번의 해를 더 볼 수 있을까. 새날이 와도 내겐 희망이 없다. 나는 늙고 병들었다. 이대로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이것은 화가의 말이다.     


늙은 수사자는 무리에서 쫓겨나 삶의 마지막을 맞이한다. 죽은 동물 사체를 독수리와 경쟁하는 처지이고… 그의 기억 속에 남은 용맹스러운 모습은 더 이상 현실이 아니다. 회화는 현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억의 그 무엇을 현실화시킨다. 나 역시 앞에 놓인 현실을 그림으로 담아낼 수 없다 하더라도… 쌓여가는 기억의 질감을 회화로 현실화(형상화)한다.     


가면을 벗고 본 모습을 드러낸다는 것은 ‘감추어진 나약함’일 것이다. 감추어진 나약함은 경쟁 사회에서, 정글과 같은 치열한 삶 속에 존재하는 리얼리티이다. 회화적 리얼리티는 대상의 숨겨진 참모습에 있지만, 사실 창작가의 자신 안에 감추어진 나약함에서 시작된다.     


회화적 리얼리티는 대상으로부터 어떠한 현실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회화적 리얼리티는 대상에 투영된 작가의 현실 태도다. 그래서 아무리 대상을 극사실로 재현할수록 비현실적인 이솝이야기처럼 보이는 것이다. 작가의 현실적 태도는 감추어진 나약함에서 비롯된다. 바로… 고립감이다. 우리의 현실에는 이솝이야기와 같은 동물 그림이 많다.     



이것은 나의 말이다.     


모든 사자는 늘 가장 용맹하고 위엄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하지만 김남표의 사자는 다르다. 그것이 뭇 화가들과 다른 김남표의 사자다. 그것이 김남표의 그림이고, 김남표의 본모습이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손바닥만큼 작은 공간에 웅크린 사자가 눈빛을 보낸다. 와서 여기 앉아보게나. 나와 이야기 좀 하세. 사자는 늙었지만, 눈빛만은 여전하다. 사자는 곧 나다. 사자는 의자에 앉는 모든 사람이다. 화가가 뒤에서 사진을 찍었다.     


아트비앤은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바로 옆 골목 안 2층에 있는 젊고 건강한 갤러리다. 손바닥만큼 자그마한 전시공간을 둘러보면서 장소가 신의 한 수라는 생각에 자연스럽게 이르렀다. 만일 넓고 쾌적한 전시장이었다면 사자는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사자의 외로움에 어울리는 공간이어야 했다. 벽과 벽 사이로 언뜻 보이는 사자의 모습은 뒷방 늙은이마냥 초라하다. 우리도 언젠가는 초라해질 것이다. 그 나약함 속에서 비로소 생의 본질을 깨닫게 될 것이다.     


전시 정보

제목원피스아트 김남표 개인전 <UNMASK>

기간: 2024년 8월 10()까지

장소아트비앤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 22-31, 2)

문의: 02.6012.1434, artbn@galleryartbn.com     

#김남표 #개인전 #UNMASK #아트비앤 #원피스아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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