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65) 최제이 개인전 <The Sanctuary>
모든 그림은 화가의 자화상이다. 그림을 보자마자 든 생각이다. 최제이의 그림을 처음 본 건 2023년 가을에 아이프라운지와 호리아트스페이스에서 열린 <아이프칠드런 엔젤아티스트 특별 자선전>이었다. 붓질의 생생함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결과 리듬감이 좋아서 뉴스에 한 컷을 넣었다. 화가보다 그림이 먼저 방송에 데뷔한 셈이다. 그리고 2024년 봄에 열린 화랑미술제에서 최제이의 작품을 조금 더 자세히 볼 수 있었다. 당시 페이스북에 최제이를 주목할 만한 작가로 소개하며 이렇게 적었다.
“최제이 작가의 작품은 전에도 다른 전시에서 보고 그 가능성을 일찍이 눈여겨봤는데, 이번에 아트스페이스 H 부스에 작품이 걸렸다. 바람이 지나가는 흔적을 유려하게 표현한 붓질이 매우 인상적이다. 붓이 흐르는 느낌이 아주 좋다. 주목해봐야 할 작가다.”
■미래의 새싹들에게 예술로 희망을…훈훈한 자선 전시회 (KBS 뉴스7 2023.09.18.)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76616
그리고 2024년 7월, 드디어 화가의 개인전이 열린다는 소식에 밥도 굶고 부리나케 달려갔다. 최제이의 그림은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생의 큰 고비를 넘긴 화가는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자신을 다독이며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람에 기운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누웠다. 거기서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바람을 그려보자. 바람이 흐르는 느낌을 화폭에 담아보자. 삶이 한 번 크게 요동치고 나자, 그림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2022년에 탄생한 ‘내면적 풍경’ 연작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2년여 동안 꾸준히 그려온 바람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서서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제이의 그림에선 바람 소리가 들린다. 붓이 지나간 흔적이 그 증거다. 때론 두꺼운 붓으로, 때론 얇은 붓으로, 화가는 캔버스 앞에 가만히 앉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결을 따라 자유롭게 붓을 움직인다. 이제 최제이의 그림을 ‘바람의 회화’라 부르자. 작가노트를 읽어본다.
나는 에스키스를 하지 않는다.
대신 영감을 주는 풍경을 촬영하여 작품 곁에 두고 즉흥적으로 붓질을 하며 바람을 그려나간다. 그렇게 텅 비어 있던 캔버스에 가장 처음 그려낸 바람이 담기면, 풍경과 작품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화면을 한참 응시하다 안료가 마르기 전에 감각에 의존해 바람을 지워나가고 다시 그리기를 수없이 반복해 작품을 구성한다. 이 과정은 타인으로 하여금 화면의 세계로 빠져들게 함과 동시에 나 스스로가 내면의 감정과 그것의 흐름에 오롯이 집중하게 만드는 과정이 된다.
작업은 계획되지 않은 붓질들로 순간의 감각에 완벽히 의존하는 과정의 연속이다. 머릿속으로 계산했던 큰 흐름 속 바람의 방향성 또한 작업 과정 중에 무수한 변화를 거치며 계획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뻗어나가기 일쑤인데, 그렇기에 나는 나의 작업이 삶과 닮았다고 말한다. 50년이라는 짧지도 길지도 않은 삶이 내게 가르쳐준 것은 계획과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 자체에 순응하고 흐름에 몸을 맡겨 헤쳐나가는 지혜였다. 이러한 삶의 가르침은 나의 작업 과정에 고스란히 투영되어 일순에 결정되는 들풀이나 갈대의 방향으로 나타나 더욱 자연스러운 바람이 되곤 했다. 붓질은 작업을 하는 행위이자 나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소리에 대한 기록으로 남는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는 바람에 흔들리는 식물들 사이에서 홀로 굳건히 서 있는 집은 모든 과정과 감정의 종착지로서 작용한다. 내게는 일종의 쉼터이자 피난처이며 성소로서의 역할을 하는 셈이다.
들판에 홀로 서 있는 집은 성소(Santuary). 이 그림들은 곧 화가의 자화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