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67) 한영섭 개인전
수확을 마치고 남은 들깨 단에서 마른 줄기를 골라 한 아름 집어 든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돌아오는 길은 마냥 평화롭고 즐겁기만 하다. 시골살이의 소소한 행복이다. 작은 가지를 모두 쳐낸 들깨 줄기를 작업실 바닥에 깐다. 딱히 정해 놓은 규칙은 없다. 손 가는 대로, 마음 가는 대로 이렇게도 놓고 저렇게도 놓는다. 준비가 끝나면 커다란 한지를 위에 얹고, 먹 바른 뭉치를 쥐고 콕콕콕콕 쿵쿵쿵쿵 찍어댄다. 들깨 줄기의 흔적이 만들어낸 선이 하나둘 한지 위에 새겨진다. 어느 정도 됐다 싶으면 한지를 들어 올려 바르게도 보고 뒤집어도 본다. 소박한 삶, 소박한 밥상, 그리고 소박하게 완성한 그림. 하지만 그림은 예사롭지 않다.
무어라 딱히 규정할 수 없는 선들이 화면에 빼곡하다. 그림 앞에 서서 그 선들을, 선들이 만나고 헤어지고 엇갈리고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세계를 가만히 응시한다. 화면은 단단하고 긴밀하다. 자연이 만들어낸 리듬이다. 꼭 만져질 것만 같은 느낌. 그래서 누군가는 촉각적인 공간감이 느껴진다고 했다. 시각을 통해 감지되는 촉각의 느낌이라고도 했다. 그런데 이 한없는 따듯함은 무엇인가. 황톳빛으로 물든 화폭이 이토록 정겹다니. 한영섭의 추상은 향토적 서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래서 추상인데도 따뜻하다. 소박하고 은근하다. ‘자연추상’이라 불러도 좋을 한영섭의 그림은 자연을 닮았다. 그래서 아름답다. 그리고 무엇보다 한국적이다.
1980년 한영섭은 경기도 광주군 초월면 지월리에 작은 집을 마련한다. 마을 뒤편의 작은 언덕 위에 있는 하얀 집이었다. 그리고 1990년 번잡하기 이를 데 없는 도시를 떠나 가족과 함께 광주에 영구 정착했다. 자연과 더불어 살며 호흡하다 보니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불규칙한 것처럼 보이는 자연에도 실은 엄격한 질서가 있다. 집 주변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림의 소재가 될 수 있다. 자연의 소재로 자연적 생성의 이미지를 표현해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추상 작업을 하지만 그 대상물은 모두 자연이에요. 숲을 바라보면 자연은 구상의 세계지만 그 안을 부분적으로 자세히 들여다보면 추상의 세계가 존재하지요. 나무 잎사귀나 식물 줄기를 들여다보아도 그렇고 돌이나 흙을 보아도 그렇고….”
1941년 평안남도 개천에서 태어난 화가는 초등학교를 5곳이나 옮겨 다녔을 정도로 불안한 유년기를 보냈다. 일찍 부친을 여읜 바람에 형편이 어려웠지만, 형들의 도움으로 형제 중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가게 된다. 고3 때 이미 국전에서 입상했을 정도로 재주를 인정받았으니 화가가 될 운명이었던 것. 한영섭은 홍익대학교 서양화과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화가 수업을 받는다. 1961년 수채화 <서울역 부근>으로 국전에서 특선을 거머쥐었다. 그림만 잘하는 게 아니었다. 대학교 2학년 때는 국전 조각 부문에도 입선했다.
대학을 졸업한 직후엔 그림 그릴 여건이 안 돼 한동안 어려웠다. 하지만 결혼이라는 걸 하고 나자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해야 했다. 어느 건물 2층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콘크리트 건물에서 육중함, 차가움이 느껴졌다. 당시 한영섭은 단청에 관심이 많았다. 단청은 권위의 상징이다. 궁궐, 사찰 등 허락된 곳에만 올릴 수 있다. 그렇다면 전통과 콘크리트라는 매체를 대비시켜보자. 한영섭의 초기 추상은 가장 권위적인 것과 현대 물질문명의 뼈대가 되는 콘크리트를 매치해 형상화한 것이었다. 이때부터 한영섭은 사물들이 맺는 ‘관계’에 주목했다. 20여 년 동안 작품에 ‘관계’라는 제목을 붙였다.
이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서양화 모방에서 탈피해보기로 했다. 우리 것이라는 게 뭐냐, 내 주위에서 소재를 찾아보자. 그렇게 해서 찾은 것이 ‘판재’였다. 1970년대 초반에 탁본 작업을 처음 시도했다. 찍어서 보이는 작업을 1970년대 말까지 지속했다. 그 무렵 강원도 평창에 놀러 갔다가 보름달이 떠 있는 상태에서 돌의 형태를 봤다. 그게 너무 아름다워서 돌 5개를 싣고 집에 왔다. 여기에 무슨 표현을 할 수 없을까. 판재 작업에서 쓰던 천(마포)으로는 안 되겠다. 그때 다가온 재료가 바로 한지였다.
한지의 미덕은 포용성이다. 돌의 단단함을 한지의 유연함으로 감싸보자. 돌과의 만남을 계기로 한영섭은 한지의 미를 발견했다. 한지는 푸근하게 들어올 뿐 아니라 거부 반응도 거의 없었다. 유일한 단점이라면 물에 약하다는 것이었는데, 그것만 피하면 훌륭한 그림 재료가 될 것 같았다. 은근하게, 모나지 않고, 강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비치는 한지의 미덕은 재료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과 일치했다. 화가는 비로소 자기 재료를 찾았다. ‘한지 탁본’이라는 한영섭의 독보적인 예술이 그렇게 탄생했다. 한영섭은 1990년 한국한지작가협회를 창립해 초대, 2대 회장을 지냈다.
“유흥적이고 유행적인 걸 따라가다 보면 우리 화단에 변화가 없어요. 그렇다면 내가 갈 길은 뭐냐. 나만 가진 장르를 개척해보자. 이것이 여러 개가 모였을 때, 여러 사람에 의해서 그런 식으로 추구됐을 때 한국 미술도 조금 더 다양성 있고 더 폭넓은, 승화된 표현이 되지 않을까. 그런 욕심에서 혼자 두들기고 있습니다.”
얼마 전 미국으로 이주한 화가가 고국에서 개인전을 연다. 평생 미술관 개인전을 주로 했던 까닭에 갤러리 개인전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화가의 대표 연작인 <관계(Relation)> 시리즈를 1970년대 초기작부터 최근 뉴욕에서 작업한 신작까지 선보인다. 그리고 전시장 한쪽에는 옥수숫대며 화살나무 가지 등이 놓여 있다. 갤러리 직원들이 화가의 지월리 집까지 가서 직접 가져온 것이라 한다. 화가의 그림을 보면서 과연 어떤 재료를 썼을까 맞혀보는 것도 전시 감상의 또 다른 즐거움이리라. 아크릴 물감으로 채색한 화사한 그림들은 화가가 올해 뉴욕에서 완성한 것들이다.
화가에 관한 자료를 찾아보니 1991년 12월 15일(일) KBS 1TV에서 방영된 <TV미술관> ‘전원, 그리고 한국의 미 – 화가 한영섭’ 편이 나온다. KBS 아카이브에서 찾은 유일한 자료다. 당시 화가의 전시는 물론 과거 작품들과 지월리 집에서 작업하는 모습도 담겼다. 최근에는 오광수 이호숙의 책 『한국 미술 100년』에 1994년 작품 <관계 9407>이 실렸다. 그게 전부다. 한영섭이란 이름은 일반 대중은 물론 미술인들에게조차 생소하다. 우리 미술사에서 한지 작업으로는 상당한 지분을 가진 화가인데도 이렇게까지 제대로 평가되지 못한 까닭이 쉬이 이해되지 않는다. 재평가가 절실한 이유다.
전시장에 걸린 작품은 어느 것 하나 모자람 없이 고른 수준을 보여준다. 자연 친화적인 소재와 작업 과정을 통해 탄생한 한영섭의 수수담백한 예술 세계를 한국적 서정 추상이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덧붙여 100년 역사를 자랑하는 옛 구세군사관학교 건물 1층에 자리한 갤러리 공간이 화가의 그림과 그렇게 잘 어울릴 수가 없다. 작은 방에서 방으로 옮겨 다니며 곳곳에 숨은 화가의 그림을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장맛비가 오락가락하는 변덕스러운 날씨에 더없이 큰 위안을 주는 전시다. 놓쳐선 안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