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68) 악셀 크라우제 개인전
화면에서 가장 먼저 시선을 붙드는 건 건물 안에 있는 여자다. 몸을 살짝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여자의 시선이 정확하게 어디에 가닿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화면 안에 있는 정보로만 보면 여자의 눈은 자동차 쪽을 향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뒷부분만 조금 보일 뿐인 자동차의 정체는 드러나지 않는다. 가만히 보니 뒷바퀴가 살짝 눈에 덮여 있다. 그런데 차체에는 눈의 흔적이 없다. 이제 막 도착했거나, 금방 왔다가 이내 떠나려는지도 모른다. 건물과 자동차 사이에 놓인 낮은 담장으로 인해 여자의 눈엔 자동차의 지붕만 살짝 보일 것이다. 화면 밖에 우리는 못 보는 누군가가 있는 걸까. 눈은 그쳤지만, 해는 흐릿하다. 여자는 그늘 안에, 창문 너머에 있다. 그림 안의 그 무엇도 뚜렷한 실체를 보여주지 않는다.
독일 화가 악셀 크라우제(Axel Krause, b.1958)는 3세대 라이프치히 화파인 신 라이프치히 화파의 일원이다. 과거 동독에 속했던 독일 중동부 도시 라이프치히(Leipzig)는 오랜 역사적, 예술적 전통을 자랑한다. 바흐가 활동하고 멘델스존과 바그너를 배출한 음악 도시이며, 출판과 문학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동독 시절 라이프치히의 화가들은 독일 전통 미술의 기반 위에 사회주의 이념을 결합한 작품을 그려 1960년대부터 서방세계에 서서히 존재감을 알리기 시작했다.
분단 독일의 특수한 상황을 담은 이들의 그림은 1977년 독일이 자랑하는 세계적인 미술 전시회 카셀 도큐멘타(Kassel Documenta)에 소개되며 세계 미술계로부터 큰 주목을 받는다. 전시에 참가한 베른하르트 하이지히(Bernhard Heisig), 볼프강 마토이어(Wolfgang Mattheuer), 베르너 튑케(Werner Tübke) 등 일군의 화가들은 라이프치히 화파(Leipziger Schule, Leipzig School)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의 전통은 이후 세대에게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거점은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교(HGB, Hochschulefur Graphik und Buch Kunst Leipzig)였다.
라이프치히 시각예술대학은 서방세계에서 물밀 듯이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매체와 사조의 홍수 속에서 과거의 방식과 전통을 고수하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였다. 1980년대에 이 대학에서 2세대 라이프치히 화파 화가들로부터 그림을 배운 이들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상과는 다른 현실이 낳은 정신적 방황과 심리적 갈등을 작품으로 표현했다. 이들은 구상 회화에 대한 신념, 탄탄한 회화 기술, 무미건조함을 향한 편애와 우울한 주제 등을 공유했다.
1세대 라이프치히 화파가 그랬던 것처럼 이들의 특별한 회화는 다시 한번 세계의 주목을 받아 1990년대 이후 세계 미술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1997년 세계적인 미술상 찰스 사치(Charles Saatchi)가 ‘센세이션’ 전을 통해 독일의 젊은 작가들을 소개한 이후로 이들은 yGa(Young German Artists)로 불렸고, 2000년대 들어 신 라이프치히 화파(Neue Leipziger Schule, New Leipzig School)라는 명칭이 보편화된다. 대표 작가로 네오 라우흐(Neo Rauch)를 필두로 팀 아이텔(Tim Eitel), 틸로 바움가르텔(Tilo Baumgartel), 마티아스 바이셔(Matthias Weischer), 크리스토프 루크해베를레(Christoph Ruckhäberle), 토비아스 레너(Tobias Lehner), 악셀 크라우제 등이 있다.
국내에 신 라이프치히 화파를 본격적으로 소개한 첫 전시는 2005년 아라리오갤러리에서 열린 <Cold Hearts Artists From Leipzig>였고, 2011년 학고재갤러리에서 팀 아이텔의 국내 첫 개인전이 열린 데 이어 2012년 성남아트센터에서 <German Now> 전이 열렸다. 2020년 대구미술관에서 팀 아이텔 개인전이, 2023년과 2024년에는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 개인전이 서울숲 갤러리아포레와 고양아람누리에서 열리는 등 최근까지도 신 라이프치히 화파 화가들의 작품이 국내에서 활발하게 소개되고 있다.
다시 악셀 크라우제의 그림으로 돌아온다. 팀 아이텔이나 크리스토프 루크헤베를레에 비하면 국내 미술계에 비교적 덜 알려진 악셀 크라우제가 한국에서 네 번째 개인전을 열고 있다. 신 라이프치히 화파가 그만큼 시장에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는 증거다. 에드워드 호퍼를 향한 열광을 생각하면 언뜻 이해되는 면이 있다. 악셀 크라우제의 어떤 작품이 호퍼를 떠올리게 한다는 점을 부인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크라우제의 그림은 끊임없이 뭔가 쓸쓸하고 불안한 정서를 환기한다. 무겁게 가라앉은 색채, 정적인 풍경, 딱딱한 인물들, 무관하게 보이는 사물들의 배치 구도가 때로는 필름 느와르의 극적 긴장감을 부르기도 하고, 몽환적인 초현실의 상상 세계로 인도하기도 한다. 그 모든 것이 한없이 낯설게만 보인다. 그런 무엇이 우리 관객의 정서를 건드리는 것인가. 사실 어떤 작품은 회화적으로 그리 단단해 보이지 않는다. 화가가 물감을 바르는 행위 자체에 완벽성을 기할 뜻이 애초부터 없었던 듯하다. 전시장을 돌다 보면 계속해서 낯섦, 어색함, 불편함과 같은 불완전성을 상기시키는 감정과 만나게 된다. 작가 노트를 읽어보자.
“내 안의 세계를 이루는 것들, 예를 들어 기억, 두려움, 소망과 야망, 신나는 일, 억압, 건설적인 생각, 질서를 사랑하는 일, 터무니없고 혼란스럽고 수수께끼 같은 정보를 나 자신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입니다. 진부하고 일상적인 이미지, 초현실적이거나 이국적인 이미지를 함께 상상해보세요. 최상의 시나리오는 나와 관람자가 특별하게 연결되는 것, 즉 공명을 생성하는 것입니다.
이미지의 배열은 주관적이고 감성적인 원칙을 따르며 객관적인 연관성은 없습니다. 작품은 과거에 대한 성찰이자 현재에 대한 주관적인 성찰입니다. 이미지들의 관계성은 원래 내 안에 숨어 있었지만, 이제는 나와 관람자를 비롯한 모든 사람에게 보이게 됩니다. 이 이미지들은 감정과 영혼의 편지이며, 전 전달된다면 나와 관람자는 친밀한 유대로 연결되리라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