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69) 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 기념전 1부
6․25 전쟁 때 헤어진 아들을 만나러 1967년 동베를린에 간 이응노는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붙들려 고국으로 끌려온다. 우리 현대사의 짙은 그늘로 남은 ‘동백림 사건’이다. 국가는 이산가족 상봉을 간첩 활동 접선으로 조작했고, 이응노는 프랑스 정부의 탄원으로 석방된 1969년 3월까지 억울하게 감옥생활을 한다.
차디찬 감방에서도 예술가는 예술이라는 밥을 거를 수 없었다. 재판을 받던 어느 날 점심으로 나무 도시락이 나오자 이응노는 주머니에 도시락을 숨겨 감옥에 돌아와선 나무 조각을 하나하나 떼어낸 뒤 밥풀로 베니어합판에 붙였다. 그리고 그 위에 고추장과 간장으로 색을 입혔다. 이렇게 만들어진 <구성>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2015년 대전 이응노미술관 소장품전 <이응노의 조각, 공간을 열다>에서 최초로 공개됐다.
교도소 밥이라는 것이 허기를 달래기에도 턱없이 모자랐겠지만, 이응노는 끼니때마다 밥알을 조금씩 빼서 모으고 종이와 찰흙을 한데 섞어 주물러 반죽한 뒤 형상을 만들었다. ‘밥풀조각’이었다. 예술이라는 밥을 거를 수 없었던 갇힌 예술가의 절실함이 빚어낸 산물이었다. 고암 이응노 탄생 120주년을 맞아 가나아트와 가나문화재단이 마련한 기념전의 1부 <고암, 시대를 보다: 사생에서 추상까지>에서 이 귀한 작품이 공개됐다. 이응노의 옥중 조각은 수량이 많지 않은 데다 재료의 특성으로 인한 취약성 때문에 전시에 자주 나오지 않는다고 한다.
하지만 그림 도구의 교도소 내 반입이 아예 막힌 것은 아니었는지 옥중에서 그린 풍경화 두 점도 전시장에 나왔다. 고암은 생전에 수감생활을 회고하며 감옥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이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라고 했다. 바깥세상과의 단절로 인한 고독과 불안, 공포를 견뎌내기 위해선 뭐라도 그리고 만들어야 했을 것이다. ‘69년 3월 안양교도소에서 고암’이라고 적은 그림은 안양교도소 뒷산인 모락산을 담은 작품이다. 이번 전시를 통해 처음으로 대중에게 공개된다.
1층 전시장에서는 이응노가 일제강점기와 해방공간의 모습을 사생한 풍경화부터 1960년대 후반에 제작된 옥중 작품을 선보인다. 이 가운데 주목되는 작품은 이응노의 1950년대 대표작으로 알려진 <취야> 연작 두 점이다. 전경에 놓인 탁자에 두세 사람이 둘러앉아 술을 마시고, 그 뒤로 여러 인물이 배경으로 묻히듯 그려진 <취야> 연작의 기본 구도를 따랐다고. 그 중에서 밀짚모자를 쓴 사람들이 보이는 그림 상단에 웃는 눈의 돼지머리가 걸렸고 왼쪽 모서리에 ‘외상은 안뎀이댜’라는 글씨가 있다. 두 작품 또한 최초 공개다. 갤러리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응노의 1950년대를 대표하는 작품 <취야>에서는 활달하고 거침없는 필치가 두드러진다. 눈에 보이는 것을 성심성의껏 옮겨 그린 이전의 사생과 달리 빠른 붓놀림으로 인물의 형태를 과감히 생략하고 왜곡해 현장의 분위기를 강조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 때문에 <취야>는 이응노의 초기 추상회화로 읽히기도 한다. 이응노는 자신의 50년대 작업을 두고 ‘반추상의 시대’라 이름 붙였다.”
이응노는 생전에 박인경, 도미야마 디에코와의 대담에서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 역시 나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이응노는 그림을 그리고 싶어 17살에 집을 뛰쳐나와 염재 송태회로부터 먹그림의 기본을 배우고 1923년 해강 김규진 문하에 들어가 서예와 사군자 등을 배웠다. 1933년 규영 정병조에게서 고암이라는 호를 받았다. 1935년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살면서 가와바타 미술학교, 혼고회화연구소에서 서양화를 배웠고, 일본 남화의 대가였던 마쓰바야시 게이게쓰의 덴코화숙에서도 공부했다. 이응노의 먹그림이 당대의 문인화와 확연히 달랐던 건 그 때문이다.
2층 전시장에서는 이응노의 먹그림과 초기 추상, 다양한 재료로 제작한 문자 추상을 보여준다. 붉은 먹으로 그린 1988년 작 <주죽(朱竹)>도 이번 전시를 통해 대중에게 처음 공개되는 작품이다. 갤러리의 설명에 따르면, 이 그림에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고 한다. 그림을 본 누군가가 과거 이응노가 정치적 사건으로 인해 부침을 겪었던 일을 떠올리며 “고암 선생님, 왜 하필 붉은 대나무를 그리셨습니까?”라고 물었더니 이응노가 소동파의 우문현답을 끌어와 “그럼, 대나무가 검은색입니까?”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1960년 프랑스 파리에 정착한 이응노는 추상으로 눈을 돌린다. 파리 생활 초기에 경제적 곤궁에 시달렸던 이응노는 버려진 잡지를 뜯어 붙이는 콜라주 작업을 시도한다. 갤러리의 설명에 따르면, <컴포지션(Composition)>이라 이름 붙여진 이응노의 콜라주는 종이를 구기거나 뭉쳐서 캔버스에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 질감을 강조하는 화면을 구성하는 데서 출발해 점차 한지를 얇게 찢어 붙여 동물이나 사람을 연상하게 하는 상형적 기호를 만들어 나열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런 도상은 콜라주 작업뿐만 아니라 수묵 추상에서도 나타나는데, 이는 이응노가 ‘서예적 추상’이라 일컬은 문자 추상의 출발점으로 여겨진다.
“서예의 세계는 추상화와 일맥상통하는 (…) 조형의 기본이 있어요. 선의 움직임과 공간의 설정, 새하얀 평면에 쓴 먹의 형태와 여백의 관계, 그것은 현대회화가 추구하고 있는 조형의 기본이지요. (…) 한자는 우너래 자연물의 모양을 따서 만든 상형문자와 소리와 의미를 형태로서 표현한 것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한자 그 자체가 동양의 추상적인 패턴이라고 할 수 있지요. 가령, 하늘 천을 그 예로 들 때 (…) 이 글자를 네모난 종이에 쓸 때 어떤 컴포지션이 될까 하는 것이 바로 추상화 세계와 통하는 것이랍니다.”
문자 추상은 이응노의 예술 세계를 대표하는 조형언어인 바, 이번 전시에서는 특히나 천이나 솜 같은 섬유 재료로 제작한 작품이 여러 점 출품돼 눈길을 끈다. 물론 추상 세계를 탐구하는 와중에도 먹그림 그리는 일을 단념한 것은 아니었다. 1층 전시장 내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면 먹그림을, 2층 복도를 지나 다음 전시장으로 옮기면 콜라주와 문자 추상 작품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