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70) 성북구립미술관 기획전 <김도희․빛선소리>
“내 몸의 입자와 내 손끝의 감각으로 그림을 그려보자. 손톱을 슥슥 갈아서 산과 물을 그렸다. 그것도 대학원 실기 시간에만.”
2004년 홍익대학교 회화과 대학원을 다니던 김도희가 작가노트에 쓴 구절이다. 전시장에서 누군가에게 이야기하는 작가의 말을 가만히 들으니, 회화과에 진학하긴 했는데 캔버스도 안 맞고 붓도 안 맞더란다. 깨끗하게 둘 다 포기한 김도희가 선택한 방법은 사포에 손톱으로 그리기였다. 겸재 정선의 <만폭동도>를 대학원 실기 수업 시간에만 조금씩 조금씩 그렸다고. 머리카락을 재료로 쓴 작가는 봤어도 손톱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얘기는 처음 듣는다. 손톱으로 사포를 긁어댔으니 자기 몸 일부를 그림에 바친 것. 이 전대미문의 작품은 2020년 작가의 첫 개인전에서 발표됐다. 김도희는 20년 만의 작가노트에 이렇게 썼다.
“나는 하나의 중심(배꼽)을 둔 별처럼 궤도를 넓히고 있었다. 시원한 감각은 몸의 곳곳이 뚫리는 광경, 즉, 밖으로 내통하는 구멍과 그 구멍을 통해 부는 바람에서 온다. 20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손톱에서 쏟아지는 폭포를 만폭동도 속사람이 되어 시원하게 느끼고 듣는다.”
회화를 전공했는데 적성에 안 맞았다. 김도희는 다른 것을 했다. 2005년에 발표한 영상 작품 <미친나무>는 버드나무 사진 다섯 장을 각각 다른 위치에서 찍은 뒤 비디오 프레임에 무작위로 배열해 재생한 작품이다. 고장 난 화면이 지직거리듯 나무가 쉴 새 없이 까딱대며 떤다. 나무는 무한 반복 재생의 루프에 빠진다. 그리하여 마침내 미치고 만다. 아쉽게도 정지된 이미지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시각의 한계, 감각의 허구를 묻는 동시에 물리적 바람을 뛰어넘는 바람에 관한 인간의 원초적 감수성, 그 자체의 강렬함을 표현한 작업이라고 한다.
김도희는 1979년생이다. 실험성과 독창성을 지닌 신진 작가를 지원하는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2014> 참여 작가로 선정돼 일찍이 주목받았다. 설치와 퍼포먼스를 중심으로 회화, 사진, 영상, 출판 등 다양한 매체를 다룬다. 2016년 제1회 성북 N 작가공모에 선정됐다.
사진에 보이는 인물은 작가 김도희 자신이다.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에 쓴 마스크로 눈을 가리고 계곡에서 주운 물새 깃털을 입에 문 채 김도희는 오로지 몸으로만 주변을 더듬어 계곡을 나아간다. 2020년 6월, 서울 구기동 계곡에서 20여 분 동안 즉흥적으로 진행한 퍼포먼스다. 물새의 깃털은 물과 대기 사이, 빛과 그림자 사이에서 일어나는 바람에 무척 예민하다고 한다. 앞이 보이지 않으니 입에 문 깃털이 안테나 역할을 한 것이리라.
김도희는 2023년 성북구립미술관 추천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공립미술관 추천작가-전문가매칭 지원사업’에 선정돼 미술비평 지원을 받았다. 이번 전시는 그 연장이다. 성북예술창작터 1층 전시장에선 김도희의 과거 영상 등 작품 몇 점을 볼 수 있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따로 있다. 1층 전시장 초입에 걸린 <손톱산수> 주변에 얼룩이 있다. 작품을 돋보이게 하려는 전시 디자인이 아니다. 김도희 작가가 손으로 전시장 벽을 문지른 목탄의 흔적이다. 작품을 끝까지 보려면 이 흔적을 따라가야 한다. 작품과 작품 사이로 난 목탄 자국은 조금씩 커지고 짙어진다. 1층 전시장 세 벽을 돈 흔적은 이제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간다.
2층 공간이 묘하다. 벽을 따라가다 보면 끝이 달팽이관처럼 말려 들어가는 공간이 있다. 안으로 깊이 들어갈수록 빛은 옅어지고, 그럴수록 흔적은 더 짙어진다. 블랙홀에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랄까. 그러다 어느새 어둠.
작업 과정을 담은 영상을 보면 김도희 작가의 손가락에 매달린 마이크가 보인다. 손으로 벽에 목탄을 바르면서 나는 소리를 녹음한 것. 작가는 두 눈을 감고 작은 목탄을 손바닥에 붙인 뒤 손이 벽을 지나가는 소리에 감응하며 자국을 만들어나갔다. 전시장을 작업실 삼아 20여 일을 오가며 하루 몇 시간씩 작업을 이어가 마침내 길이 43m가 넘는 전시장 벽을 길게 연결하는 장대한 작품을 완성했다. 손바닥 피부로 그린 그림. 가장 정직한 예술가의 몸으로 그린 하나뿐인 그림이다.
나선형 벽에 작가의 글이 있다.
“새 몸에 닿아보려 통증으로 팽창한 나는, 자전하며 긴 숨으로 하얀 자궁을 짓고 그 벽에 뺨을 대고 차력하듯 밀어내다가… 마침내 표면이 사라져 흰 벽 밖의 우주에 닿을 때… 진하게 줄어든 속 몸은 커진 구멍을 잡고 다른 몸으로 뒤집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