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80) 고정남 개인전 <아리랑 서울>
여기, 한 젊고 아리따운 처자의 사진이 있다. 백옥 같은 피부, 맑은 눈동자, 붉은 입술, 두 갈래로 가지런히 흘러내린 머리. 노랑 한복 저고리에 빨간 동정과 고름. 전형적인 도시 미인에게 한복은 어쩐지 조금 안 어울리는 것 같기도. 배경에는 짙은 군청의 화판 뒤로 이젤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렇다면 이곳은 화가의 아뜰리에? 저 처자는 필시 그림의 모델일 것이다. 그런데 어라, 어디서 많이 본 이미지인데?
그렇다. 화가가 되고 싶어 독학으로 미술을 공부해 당대에 이름을 널리 알렸지만, 채 서른을 못 채우고 아깝게 세상을 떠난 화가 김종태(1906~1935)의 대표작 <노란 저고리>다. 고정남의 사진은 바로 이 그림과 거의 똑같은 장면을 연출해서 찍은 것이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림 속 소녀의 얼굴은 살이 한껏 올라 후덕한 모습이지만, 사진 속 처자는 갸름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이 시대의 미인이다. 시대가 바뀌면 미의 기준도, 미감도 변하기 마련.
이분 역시 어디서 많이 뵌 분이다. 깔끔한 단발에 코밑과 턱에 수염을 길렀고, 윗도리 앞섬을 풀어헤친 채 부채를 들었다. 요즘 같은 한여름 무더위 속이었으리라. 배경에는 책 몇 권과 함께 그림 액자 한 귀퉁이가 보인다. 그러고 보니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로 기록된 춘곡 고희동의 자화상이 아닌가.
인물뿐만이 아니다. 정물화도 있다. 박수근의 1950년대 작품 <복숭아>를 똑같이 연출해서 찍은 사진이다. 심지어 크기까지 똑같이 맞췄다.
고정남 작가는 단순히 과거의 그림을 그대로 재현한 데서 머물지 않았다. 서진달(1908~1947)의 1940년 작 <교복을 입은 남학생>을 재현한 사진 속 인물은 교복만 입었을 뿐 연세 지긋한 노인이다. 그림이 완성된 시점으로부터 장장 84년이 흘렀다. 소년은 이제 늙었다. 더는 그림 속 앳된 청춘이 아니다. 그 긴 세월의 흔적이 사진에 고스란히 담겼다.
고정남의 사진은 우리 근현대 회화의 역사성과 미적 가치를 오늘의 시각으로 새롭게 바라본 결과물이다. 그것은 일제강점기와 전쟁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살면서도 손에서 붓을 놓지 않았던 화가들에게 바치는 헌사다. 고정남의 사진을 통해 우리는 불과 100년 안쪽에서 탄생한 그림들의 존재를 새롭게 바라보게 된다. 작가 노트를 읽어보자.
“이번 전시의 시리즈는 한국 근대 회화작품을 오마주하여 사진의 확장 가능성을 실험했다. 1900년경부터 1960년대까지 20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우리나라 근대 미술은 역사적 격동기를 지나고 있는 한국의 시대상과 사회적 변화를 촘촘히 담고 있다. 시대 변화에 따른 매체 특수성을 활용한 재해석을 통해 당대 작가들이 시대와 어떻게 상호작용을 했는지 탐구하고 우리나라 근대미술 시기 특징을 살피고 다양한 오브제를 빌려 색의 감정을 담아 은유적으로 표현해 보았다.”
과거의 그림을 현재의 사진으로 본다. 흥미로운 발상이다. 사진의 질감도 고풍스런 느낌을 살렸고, 심지어 액자까지 낡은 옛것처럼 꾸몄다. 진지한 사진도 있지만, 웃음을 주는 사진도 있다. 다른 방식으로 보는 일은 언제나 즐겁다. 전시장을 돌면서 어, 이거 그 화가의 그 작품이잖아, 발견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답을 찾는 건 각자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