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89) 키아프 서울 2024 참관기
9월 4일(수) 오후 2시, 키아프 행사장에 발을 디뎠다. 프리즈 전시장에서 2시간을 꼬박 보내고 요기할 겸 잠시 쉬었다. 작년에는 키아프를 먼저 보고 프리즈는 건성으로 돌았다. 하지만 올해는 분명히 달랐다. 여태까지는 촬영팀과 함께 방송 취재를 목적으로 간 까닭에 미리 점 찍어둔 곳들을 빠르게 돌며 찍을 것만 얼른 찍고 빠지느라 전시장을 제대로 둘러볼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나 혼자였다. 시간도 넘쳐났다. 드디어 프리즈, 키아프를 모두 온전히 감상할 수 있었다. 미술기자의 역설이다.
수많은 갤러리스트와 작가와 지인을 만났다.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다. 고마운 일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방송이 미술을 너무 안 다뤄요. 언제 다시 문화부로 돌아오실 거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지금 방송국의 상황은 한마디로 처참하다. 문화부로 다시 보내준대도 정작 내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씁쓸하다. 하지만 내가 미술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결론부터. 올해도 키아프는 덩치 큰 프리즈에 눌렸다. 물론 더 큰 세계의 다양한 미술품을 보려는 이들이 프리즈로 몰리는 건 당연지사. 나부터 그러니까. 무엇을 반성하고 무엇을 배워 어떻게 변화하느냐에 따라 키아프에게 프리즈는 위기일 수도, 기회일 수도 있다. 이제 햇수로 삼 년째가 됐으니 지난 두 해의 경험을 통해 키아프가 심기일전했으리라 기대한 이유다. 키아프 전시장에서 나는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집중했다.
■김윤경 × 김종규 × 이예림 × 본화랑 (A10)
본화랑 전속 작가 김윤경은 자아와 삶의 존재에 관한 근본적인 물음과 내면의 성찰 과정을 부드러운 유채의 효과를 통해 풀어낸다. 빛, 하루, 여행 등의 시리즈로 일상의 의미와 삶의 경험을 진솔하게 녹여낸 작품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풍경으로 소통한다. 온화하고 따스한 시선이 담긴 김윤경의 작품은 특유의 차분하고 잔잔한 감성으로 사색과 위로의 시간을 전한다.
김윤경의 회화에서 빛과 어둠은 상징적인 비유로서 자아와 삶을 표상하는 장치다. 양면적인 내면세계를 암시하는 빛과 어둠은 자아 성찰 과정을 내포하며 명암의 회화적 효과를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화면에 표현된 빛은 눈 부시거나 강렬하지 않으며 어둠 또한 칠흑같이 짙거나 캄캄하지 않다. 빛과 어둠은 극명하게 대조되거나 충돌하기보다 매끄럽게 교차하고 은은하게 혼합된다. 이는 삶의 은유로서 밝음과 어둠의 공존을 자연스럽게 포용하는 성숙한 태도로 읽힌다. (2023년 본화랑 개인전 보도자료)
김종규는 삶의 본질을 마주하는 공간으로서의 자연을 고요히 관조하고 사유한다. 진한 농묵으로 그려낸 자연 풍경은 작가의 철학적 상념이 담긴 치열하고 순수한 사색의 기록물이다. 세상을 거짓이나 꾸밈없이 바라보고자 하는 그의 곧은 심지는 빛과 어둠이 극명히 나뉘는 강렬한 역광의 순간에 점화된다. 가시적 현란함이 제거되고 자연의 본래적 형상만이 또렷해지는 압축된 풍광은 경이로운 순간일 터. 그는 역광의 순간에 드러난 자연의 정수를 가감 없이 포착한다. 한 획 한 획 명료하고 담백하게 그려낸 절제된 실루엣은 부수적인 외형을 걷어내고 본질만이 남아 있는 정제된 세계를 보여준다.
김종규는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자연 질서의 작용을 흑백의 함축된 화면에 담아낸다. 작가는 자연의 구체적 실체와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지만 존재하는 자연 요소와의 관계성을 수묵과 여백의 형태로 풀어내어 자연 세계를 향한 다차원적 심상을 유도한다. 화면에 먹으로 표현된 나무의 형상은 비단의 여백이 내포하는 자연의 시공간성으로 풍부한 생동감을 얻는다. 텅 빈 여백을 감도는 듯한 차가운 바람, 겨울 자락 끝의 적막한 공기, 어둠을 감싸는 고요한 빛 등의 심상은 나무 실루엣으로 스며들어 그윽한 침묵의 풍경을 이룬다. (2022년 본화랑 개인전 보도자료)
이예림 작가는 여행을 다니며 관찰해온 다양한 건축물들을 컬러풀한 색채로 그리며 도시와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아냈다. 건물을 세우기 전에 땅을 다지는 단계가 중요한 것처럼, 이예림 작가도 물감으로 건축물을 쌓기 전 밑바탕을 다지는 과정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돌가루가 섞인 물감을 여러 번 쌓아 배경을 만든다. 또한, 주사기를 통해 곡선과 직선이 자유로이 이어지면서 서로 연결되고 겹쳐지는 선들은 구조물과 음영을 만들어낸다. 한 겹 한 겹 견고하게 다져진 화면은 작가의 진심이 전해진다. (2024 본화랑 개인전 뉴시스 기사)
■히로시 센주 × 순다람 타고르 갤러리 (A11)
2000년에 설립된 순다람 타고르 갤러리(Sundaram Tagore Gallery)는 뉴욕, 싱가포르, 런던에서 전시장을 운영한다. 전 세계의 기성 및 신진 예술가들을 대표하며, 미적, 지적으로 엄격하고 휴머니즘이 깃든, 역사적으로 중요한 예술 작품을 전문으로 전시한다. 아티스트들은 동서양의 다양한 형식적 전통, 아이디어, 철학을 종합해 문화와 국가의 경계를 넘나든다. 이 갤러리가 올해 키아프에 참가해 히로시 센주라는 작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소개했다.
히로시 센주(Hiroshi Senju)는 1958년 일본 도쿄 출생으로 현재 뉴욕에서 활동하고 있다. 전 세계 박물관과 공공장소에 설치된 기념비적인 규모의 폭포와 절벽 이미지로 유명하다. 추상표현주의에 뿌리를 둔 미니멀한 시각 언어와 일본의 전통 회화 요소를 결합한다.
런던 빅토리아&앨버트 박물관에서 현재 여러 가지 색의 폭포가 전시 중이다. 베네세 아트 사이트 나오시마에는 여러 작품이 설치되어 있으며, 최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일본 고야산의 사찰 곤고부지에 폭포와 절벽을 그렸다. 센주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 로스앤젤레스 현대미술관, 샌프란시스코 아시안 아트 뮤지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등에 소장돼 있다.
■채성필 × 갤러리 그림손 (A18)
채성필 작가는 현재 파리에서 작품활동을 하며 살고 있다. 작품의 재료는 천연 흙이다. 작가에게 흙은 어릴적부터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었다. 천연흙에 물, 숯, 먹, 미디엄을 섞어 캔버스에 붓거나 뿌리고, 물을 흘리면서 작품을 표현했다. 이러한 선들은 물이 흘러 내려간 자국들이다. 흙과 물은 지구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이며, 작품 안에는 우주의 원소 흙, 불, 물, 공기를 담고 있다. 블루색도 천연흙에서 추출한 천연 피그먼트이다.
작가는 인간이 살고 있는 지구 안에 가장 원초적인 근본을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작품은 위, 아래의 구분이 없으며, 여러 각도에서 볼 수 있다. 방향마다 다른 느낌으로 볼 수 있다. 세계 유명 컬렉터 프랑소와 피노가 소장하고 있다. 작가는 한국, 프랑스, 독일, 스웨덴, 벨기에 등 많은 유럽에서 전시하고 있다. (키아프 2024 갤러리 안내문)
얼마 전 자기 자식과도 같은 작품을 158점이나 폐기하는, 쉽지 않은 결단을 내린 작가의 진정성을 높이 평가하고 싶다.
■안경수 × 아라리오갤러리 (A19)
안경수(b. 1975)는 지난 10여 년간 교외의 여러 지역을 오가며 도시와 도시 사이 변두리의 풍경에 주목해왔다. 풍경이 되지 못한, 또는 풍경이기를 지향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장면들을 보고 경험하는 일이다. 그러한 풍경은 한시적이며 가변적인 ‘부유하는 풍경’으로서 해석된다. 그는 주변부로 밀려난 더미들과 사물들을 사생하고, 그 결과물로서의 회화를 실제 풍경 위에 중첩하여 사진 기록을 남기기도 한다. 다양한 장소에 거주하며 장소 특정적 풍경 및 현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그린 그림 자체를 하나의 새로운 층위로 규정함으로써 풍경과 맞닿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작가는 풍경의 부산물을 좇으며 체화한 감각을 회화의 언어로 변환한다. “쓸어 담기엔 너무나 미약한 먼지 같으면서도 방치하기에는 걸리적거리는” 특유의 장면들은 부유하듯 움직이고 사라졌다가 드러나기를 반복한다. 안경수는 이들을 유심히 바라보며 각각의 사물 및 장면 너머의 감각을 회화의 방식으로 천천히 재현한다. 그의 말에 따르면 “우리 주변의 모든 풍경은 그러한 부산물이 천천히 쌓여가는 풍경들”이다. (아라리오갤러리 홈페이지)
■손상기 × 샘터화랑 (A52)
화가 손상기는 1949년 전남 여수 태생으로 초등학교 때 척추를 다쳐 성장이 멈추는 불구가 됐다. 그래서 ‘꼽추화가’, ‘한국의 로트레크’로 불렸다. 고향 여수의 바다와 어시장을 소재로 작업하다가 1979년 상경해 아현동 굴레방다리 근처 화실에서 지내며 도심 변두리 삶을 ‘공작도시’라는 연작으로 담아냈다. 이후 사회와 역사 문제로 작품 세계를 확장했다.
1981년 첫 개인전을 연 이래 중앙미전, 구상전 등에서 수상했고, 〈문제작가전〉 〈해방40년 민족사전〉 〈30대 기수전〉 등에 참여했다. 1983년 샘터화랑과 인연을 맺은 이후 해마다 샘터화랑에서 개인전을 열며 후원을 받았다. 1988년 지병이 악화해 39살 나이로 요절했다. 1998년 샘터화랑에서 〈10주기 유작전〉이 열렸고 작가가 생전 자신의 삶과 작품 세계에 관해 기록한 글과 작품을 담은 화문집 《자라지 않는 나무》가 출간됐다. (네이버 블로그 ‘미하나 세심정’)
■윤종석 × 히든엠갤러리 (A95)
윤종석 작가는 기존의 작품에서 변화된 신작을 발표한다. 작가는 긴 여행을 통해 스스로 존재와 조금 더 가까워지면서 계속되는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매일 새로운 오늘이 어제를 덮어 버렸고 풍경을 채우던 풀과 나무, 사람, 바람들이 떠나거나 잠든 이후에 사물이 사라지면서 완벽한 추상이 되었음을 느꼈다. 이에 단순한 것이 더 깊은 여운과 감정을 움직일 수 있음을 보았다. 작가는 여행을 통해 “시간의 길 위에서 양식을 얻었다”고 말한다.
작가는 긴 시간 이후에 그림을 그리고 싶어 했다. 윤종석 작가의 색은 감정 전달의 매개체가 되며 물감 덩어리는 시간을 품게 된다. 이전까지 이성적 생각의 결과들을 표현해 왔다면, 이제는 감정의 잔재들이 그의 주된 작품이 될 것이다. (키아프 2024 갤러리 안내문)
■최제이 × 아트스페이스 H (B71) / 강요배 × 학고재갤러리 (B25)
생의 큰 고비를 넘긴 화가는 긴 어둠의 터널을 빠져나온 자신을 다독이며 제주로 여행을 떠났다고 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람에 기운 나무를 보았다. 나무는 바람을 거스르지 않고, 바람이 부는 쪽으로 누웠다. 거기서 화가는 자신의 얼굴을 보았는지도 모른다. 문득 영감이 떠올랐다. 바람을 그려보자. 바람이 흐르는 느낌을 화폭에 담아보자. 삶이 한 번 크게 요동치고 나자, 그림도 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2022년에 탄생한 ‘내면적 풍경’ 연작이 그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2년여 동안 꾸준히 그려온 바람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서서히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최제이의 그림에선 바람 소리가 들린다. 붓이 지나간 흔적이 그 증거다. 때론 두꺼운 붓으로, 때론 얇은 붓으로, 화가는 캔버스 앞에 가만히 앉아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마음의 결을 따라 자유롭게 붓을 움직인다. 이제 최제이의 그림을 ‘바람의 회화’라 부르자.
키아프 전시장을 나오면서 마지막으로 학고재갤러리 부스에 걸린 강요배의 그림 <구름 속에> 앞에 섰다. 하늘을 뒤덮은 짙은 먹구름, 그 사이로 살짝 고개를 내민 빛의 띠. 그러므로 우리는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꿈꿀 수 있고, 이 잔인한 현실 속에서도 굽히지 않는 한 줄기 마음을 간직할 수 있다. 그 마음은 화가의 것이었으나 그림을 보는 모든 이에게 전염되어 더 큰 세상으로 뻗어나갈 것이다. 강요배의 색은 신비롭다. 왜 그를 거장이라 하는지 알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