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88) 프리즈 서울 2024 참관기
9월 4일(수) 오전 11시. 문이 열림과 동시에 프리즈 행사장에 발을 디뎠다. 3년째 똑같이 하는 일이지만, 올해는 분명 달랐다. 앞선 두 해는 촬영팀과 함께 방송 취재를 목적으로 간 까닭에 미리 점 찍어둔 곳들을 빠르게 돌며 찍을 것만 얼른 찍고 빠지느라 전시장을 제대로 둘러볼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올해는 나 혼자다. 이제야 프리즈, 키아프를 온전히 감상할 수 있게 된 것. 미술기자의 역설이다.
수많은 갤러리스트와 작가와 지인을 만났다. 가는 곳마다 환대받았다. 고마운 일이다. 사람들이 묻는다. 방송이 미술을 너무 안 다뤄요. 언제 다시 문화부로 돌아오실 거예요? 글쎄. 나도 모르겠다. 지금 방송국의 상황은 한마디로 처참하다. 문화부로 다시 보내준대도 정작 내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씁쓸하다. 하지만 내가 미술기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에 집중한다.
결론부터. 올해도 큰 거 한 방은 없었다. 시장은 나아지지 않았다. 물론 무엇을 기대하느냐에 따라 실망의 정도는 달라질 터. 애초에 한 방을 기대하지 않았던 나는 익숙한 것들 속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 데 집중했다. 내가 몰랐던 새로운 미술가를 만나는 것만큼 좋은 미술 공부가 어디에 있겠는가. 프리즈나 키아프 같은 대규모 아트페어는 그걸 가능하게 해주는 절호의 기회이니.
■다니엘 아샴 × 장 줄리앙 × 난주카(Nanzuka)
프리즈 먼저. 코엑스 3층 D홀 입구를 지나 가장 먼저 만난 작품은 미국 뉴욕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다니엘 아샴(Daniel Arsham)의 회화 두 점이다. 아샴은 상상의 고고학(Fictional Archaeology)이란 개념을 중심으로 먼 미래에서 현재의 물건들을 발굴하듯 동시대 문화 아이콘이 부패하거나 부식되고 풍화된 모습을 재현한다. 분절된 아이돌(Fractured Idols) 연작에선 인공지능(AI)을 활용해 고대와 현대의 우상을 상징하는 형상을 한 화면에 병치해 보여준다. 전시장에 걸린 두 점 모두 올해 완성한 신작이다.
프랑스 출신의 그래픽디자이너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 국내에도 꽤 많이 알려진 작가 장 줄리앙(Jean Jullien)의 2023년 작 <Slider>는 시원하게 펼쳐진 푸른 바다 위에서 물살을 가르며 거침없이 나아가는 서퍼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낸 작품이다. 길고도 무더웠던 여름의 끝자락에서 눈이 시원해지는 상쾌함을 주는 그림이라 눈여겨봤다. 일본 도쿄의 난주카(Nanzuka) 갤러리 C12 부스.
■호세 레르마 × 알민 레슈(Almine Rech)
프랑스의 유명 미술품 딜러이자 갤러리 오너인 알민 레슈(Almine Rech)가 1997년 자기 이름을 따 파리에 문을 연 현대미술 갤러리 알민 레슈는 아크릴 물감을 사용한 독특한 기법의 인물화로 유명한 스페인 출신 작가 호세 레르마(Jose Lerma)의 2024년 신작 <Elianis>를 내놓았다. 레르마는 물감을 두껍게 바르는 임파스토(impasto) 기법으로 유명해서, 이번에 선보이는 작품 역시 입체감이 살아 있는 표면이 마치 고무나 지우개, 진흙의 질감을 닮았다. 레르마는 2007년 아라리오 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연 바 있고, 지금도 국내 경매에 심심찮게 작품이 나온다. 알민 레슈(Almine Rech) 갤러리 C25 부스.
■김환기 × 변월룡 × 백남준 × 학고재갤러리
김환기의 1951년 작 <피란열차>가 프리즈에 등장한 것은 내 관점에서 올해 프리즈 최대의 사건이었다. 화가는 이 그림에 어떤 거추장스러운 것도 그려 넣지 않은 채 오로지 푸른 하늘과 핏빛으로 물든 땅과 열차와 피난민만을 채워 넣었다. 열차는 떠날 수 있을까. 언제, 어디로 가게 될까. 살기 위해 열차에 오른 저들은 과연 어딘지 모를 목적지에서 또 다른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
형체만 있을 뿐 표정이 보이지 않는 얼굴들도 위에서 본 다른 그림들과 마찬가지. 전쟁의 와중이라고는 믿기 힘든, 피란 행렬이라고도 보기 힘든 저 낯선 풍경은 언뜻 목가적으로 보이기조차 한다. 그런데도 직접적으로 비극의 현장을 묘사한 그 어떤 그림보다도 더 짙게 드리워진 비극의 실상을 피부로 느끼게 한다. 생각해보면 그게 바로 예술이 아닐까. <피난열차>라는 제목으로 오래 불려왔지만, <피란열차>라고 정확하게 고쳐주는 게 좋겠다. 더불어 김환기의 1960년대 작품 <무제>도 주목에 값한다.
화가 변월룡의 작품 <빨간 옷을 입은 소녀>, <어머니>, <금강산의 소나무> 3점도 주목된다. 이 가운데서 특히 <어머니>는 변월룡이 1985년 당시 자신의 어머니를 그린 전신 초상화로, 우찬규 학고재갤러리 대표가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품이라고 했다. 변월룡은 척박한 연해주 땅에서 러시아 국적을 지닌 고려인의 후손으로 태어나 그 어려웠던 시절에 고려인으론 사상 최초로 당대 최고의 러시아 명문 레핀 예술대학에 들어가 박사 학위를 따내고 조교수까지 된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2016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변월룡 회고전에서 소개된 작품 가운데 3점이 시장에 나왔다.
세계적인 비디오 아티스트 백남준의 1990년 작 <구/일렉트로닉 포인트>는 냉전이 끝난 뒤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제창한 세계 화합의 가치를 기리는 특별한 작품이다. 축구공을 형상화한 커다란 구체 모양의 구조물 안에 선반을 만들고 아래에서 위까지 차례로 크고 작은 브라운관 모니터 22대를 쌓아 올린 대작이다. 학고재갤러리 소장품으로 그동안 여러 전시에서 백남준의 대표작 중 하나로 소개된 바 있다. 이상 학고재갤러리 M18 부스.
■살보 × 마졸레니 × 글래드스톤 × 스프뤼스 마거스
올해 프리즈의 떠오르는 화가는 단연 작고한 이탈리아 작가 살보(Salvo). 본명은 살바토레 맨지오네(Salvatore Mangione). 시칠리아 섬의 레온포르테(Leonforte)에서 태어난 작가는 초기엔 초상화를 그려 팔거나 인상주의 화파의 영향을 받은 풍경화를 주로 그렸다. 그러다가 유럽 전역에서 파리 68혁명에서 촉발된 ‘인간다운 삶’을 위한 급진적 운동이 전개되자, 토리노를 중심으로 가장 빈곤한 재료로 작품을 제작해 자본주의의 사회적 병폐와 기성 회화에 대항하자는 아방가르드 예술 운동 아르떼 포베라(Arte Povera)에 동참했다. 작가는 이 시기에 기존 평면 회화가 아닌 사진, 조각 형식을 빌린 개념주의 작품 등을 선보이다가 1973년 다시 회화로 돌아갔다.
살보의 작품이 국내에 처음 본격적으로 소개된 것은 지난해 프리즈 서울(Frieze Seoul)이었다. 영국 런던에 기반을 둔 갤러리 마졸레니(Mazzoleni)가 살보의 2001년 작 <Una Sera>를 선보인 이래 살보의 작품 여러 점이 팔리면서 국내에서도 살보라는 낯선 작가가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했다. 올해 4월 케이옥션이 국내 경매사로는 처음으로 살보의 소품 <Novembre>(2008)를 선보인 데 이어 서울옥션도 6월, 7월 경매에서 살보의 작품을 선보였다.
살보를 대표하는 갤러리 마졸레니가 올해 프리즈에서 그림 6점을 한꺼번에 내놓았다. 지난해 한국 시장에서의 첫 반응, 그리고 이후 경매에서 살보의 작품이 조금씩 팔리면서 인지도를 높여 온 과정을 통해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걸 감지했는지 다른 갤러리 두 곳도 살보의 작품을 걸었다. 글래드스톤(Gladstone)이 1점, 스프뤼스 마거스(Sprüth Magers)가 2점이다. 마졸레니(Mazzoleni) M5 부스. 글래드스톤 갤러리 C7 부스. 그리고 B23 부스에 자리한 스프뤼스 마거스 갤러리는 한국 작가 송현숙의 작품 2점도 함께 선보였다. ‘붓질’하면 요즘은 이배 작가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이 많겠지만, 나는 송현숙의 작품에서 훨씬 더 깊은 맛을 느낀다. 보면 볼수록 좋은 작품이다.
■아이웨이웨이, 웨민쥔, 그리고 니콜라스 파티
독일 베를린의 노이게리엠슈나이더(neugerriemschneider) 갤러리는 뭉크의 그림 <절규>를 레고 블록으로 재해석한 중국 작가 아이웨이웨이(Ai weiwei)의 작품을 걸었다. 아이웨이웨이의 또 다른 대형 삼면화 <Dropping A Han Dynasty Urn>이 탕 컨템포러리 아트(Tang Contemporary Art) 갤러리 부스 한 면을 차지했는데, 한나라 시대 항아리를 바닥에 떨어뜨려 깨뜨리는 자신의 모습을 천연덕스럽게 레고 블록으로 짜 맞춘 이 작품을 보면 역시 아이웨이웨이답다. 요즘은 시장에서 잘 보기 힘든 중국 작가 웨민쥔(Yue Minjun)의 2023년 작 <Xiu>도 탕 컨템포러리 부스에서 볼 수 있었다.
하우저앤워스(Hauser & Wirth) 갤러리는 현재 호암미술관에서 대규모 개인전을 열고 있는 세계적인 작가 니콜라스 파티(Nicolas Party)의 삼면화 작품 <Triptych with Red Forest>를 선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