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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Sep 03. 2024

문화유산 탐방기⑧ 통의동 백송터


경복궁의 서문인 영추문(迎秋門)에서 서남쪽으로 가까운 곳에 창의궁(彰義宮)이라는 별궁이 있었다. 영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연잉군 시절 9년 동안 머물렀던 곳이다. 원래 이곳은 효종의 넷째 딸 숙휘공주의 남편 정제현의 집이었는데, 숙종이 사들여 자기 넷째 아들 연잉군에게 줬다. 1721년(경종 1년) 연잉군이 왕세제가 돼 궁궐에 들어가 살면서 근처 창의문에서 딴 창의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이곳에서 말년을 보냈다. 영조는 재위 시절 수시로 어머니가 모셔진 사당 육상궁을 참배한 뒤 신하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창의궁에서 하룻밤을 지낸 적이 많았다. 창의궁은 1908년 일제에 의해 헐려 사라졌다.     



창의궁이 있던 자리에 백송(白松) 한 그루가 남아 옛 자취를 전했다. 높이 16m, 가슴둘레 5m로 우리나라의 백송 가운데 가장 크고 생김새도 빼어났다는 이 백송은 1962년 천연기념물 제4호로 지정돼 귀하게 보살핌을 받다가, 1990년 7월 17일 태풍에 넘어져 생명을 다하고 말았다. 지금은 바짝 마른 밑동만 남아 있다. 유서 깊은 백송의 죽음을 안타까이 여긴 주민들이 백송 옆에 후계목을 여러 그루 심었다. 죽은 백송을 호위하듯 후계목 세 그루가 힘차게 하늘로 줄기와 가지를 뻗어 그늘을 만들어주고 있다.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통의동 36-15. 백송터가 보이는 남쪽 골목 초입에 서면 오른쪽 담벼락에 오래전에 주민들이 쓴 거로 보이는 ‘통의동 백송’이라는 글자가 두 군데 남아 고색창연함을 더한다. 새 주소로는 자하문로 6길. 살림집이 다닥다닥 붙은 오래된 골목을 걷는 기분이 더없이 상쾌하다. 찾아오는 이가 많아 적잖이 소란스러웠는지 맞은편 담벼락에 붙은 안내도를 보니 길 이름을 ‘속삭임길’이라 붙여놓았다.    

 


죽은 백송의 밑동 아래에 서울 통의동 백송이라 새겨진 오래된 비석이 서 있다. 그리고 나무뿌리를 쥔 흙이 흘러내리지 않도록 주변을 빙 두른 화강암에는 추사 김정희가 즐겨 썼다는 글귀 山崇海深 遊天戱海(산숭해심 유천희해) 여덟 자가 새겨져 있다. 풀이하면 ‘인품은 산처럼 높고 바다처럼 깊게, 기품은 하늘에서 노는 학처럼 바다 위를 나는 기러기처럼’이란 뜻이다. 서예가 유천 이동익의 글씨다. 비석 옆에 옛것으로 보이는 석부재 몇 점이 놓여 있는데, 이것이 창의궁에서 나온 것인지는 모르겠다. 다만 그것 자체로 사람이 살았던 흔적을 더듬게 하고, 나무만 멀뚱하니 남은 장소에 유서 깊음을 더하니 그대로 두어도 족하리라.     



죽은 백송 밑동을 타고 줄기식물들이 기어올라 마치 초록 머리칼이 자란 것 같은 묘한 광경을 연출한다. 보기에 따라서는 손가락 세 개를 떠올리게도 한다. 또 하나, 백송의 줄기를 자세히 관찰해보면 색이 다른 껍질들이 겹쳐지면서 만들어내는 유려한 곡선이 마치 한 폭의 추상화를 보는 듯하다.     



몇 해 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서울 편 집필을 위해 유홍준 교수가 꾸린 답사팀에 끼어 백송의 존재를 처음 만난 기억이 있다. 아주 무더운 어느 날 오전, 근처에서 전시회를 보고 나서 잠시 주변을 어슬렁거리다가 그때 생각이 나서 잠시 땀을 식힐 겸 백송 주변에서 한참을 서성였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11권을 펼쳐 백송나무에 관한 글을 읽고, 그날 찍은 사진과 함께 정리해 기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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