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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29. 2020

지폐에 깃든 우리 옛 그림 이야기

박강리 《지갑 속의 한국사》(북하우스, 2020)

최근에 출간된 이 책에 관심을 둔 이유가 있습니다. 꼭 4년 전에 <세뱃돈에는 어떤 옛 그림들이 숨어 있을까?>라는 글을 쓴 적이 있거든요. 책에 관한 이야기는 뒤에 다시 하기로 하고 우선 당시에 쓴 글을 조금 줄이고 다듬어서 이 자리에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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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 명절을 분주하게 지내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새해 복 듬뿍 받으셨는지요? 설하면 빼놓을 수 없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세뱃돈이죠. 은행 창구에서 번호표 뽑아 들고 기다려 빳빳한 새 돈으로 두둑하게 바꾸는 일도 오직 1년에 한 번, 설 대목에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진풍경입니다.     


우리가 지금 쓰는 지폐는 액면가에 따라 천원 권, 오천 원권, 만 원권, 오만 원권, 이렇게 네 가지가 있습니다. 혹시 지갑이나 호주머니 안에 고이 모셔져 있는 지폐를 자세히 들여다보신 적 있나요? 앞면에는 우리 역사를 빛낸 위인들의 얼굴이 그려져 있죠. 그리고 그 인물을 가장 잘 설명해줄 수 있는 상징물 도안과 함께 우리 옛 그림들이 곳곳에 숨어 있습니다.     


     


천원 권 지폐의 주인공은 조선 중기의 대학자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입니다. 이 초상은 이당 김은호(金殷鎬, 1892~1979)에게서 그림을 배운 한국화가 이유태(1916∼1999) 화백이 그린 표준영정입니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들이 중구난방으로 그려지는 걸 방지하기 위해 1973년에 당시 문화공보부가 동상·영정심의위원회라는 걸 설치하고 나름대로 철저한 고증을 거쳐 표준으로 삼을 만한 위인들의 초상을 정했다고 합니다. 퇴계 선생의 표준영정은 그때 정해진 겁니다.     


초상 왼쪽에 보이는 건물은 성균관 명륜당입니다. 퇴계 하면 안동 도산서원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만, 선생이 조선 시대에 유학생들을 가르치던 이곳의 책임자인 대사성을 지낸 이력을 더 중요하게 고려한 걸로 보입니다. 그 위로는 조선의 선비들이 그토록 사랑해 마지않았던 매화가 꽃을 피운 채 멋들어지게 가지를 드리우고 있습니다. 퇴계 선생의 매화 사랑은 특히 남달랐다고 하죠. 생전에 얼마나 끔찍이도 매화를 아끼셨으면 세상을 떠나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남긴 한 마디가 “매화에 물을 주어라.”였겠습니까. 그 고결하고 기품 있는 선비 정신이 순백의 매화와 참 많이 닮아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 우리의 시선은 지폐 뒷면으로 향합니다. 아주 운치 있는 물가 풍경이 화폭 위에 수려하게 펼쳐진 이 그림은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추앙받는 겸재 정선(鄭歚, 1676~1759)의 <계상정거도>란 작품입니다. 이 유명한 그림은 보물 제585호로 지정된 <퇴우이선생진적(退尤二先生眞蹟)>이란 책에 수록돼 있습니다. <퇴우이선생진적>은 당대의 대학자로 칭송된 퇴계 선생과 우암 송시열 두 분의 친필에 겸재 정선의 그림과 사천 이병연의 시 등을 묶어 만든 서화집입니다.     


2012년 당시 미술품 경매회사 K옥션의 가을 경매에서 34억 원에 팔리며 국내 고미술품 사상 최고가를 기록해 장안의 화제가 됐죠. 게다가 낙찰을 받은 주인공이 삼성문화재단이란 사실이 뒤늦게 알려져 비상한 관심이 쏠렸습니다. 이 책에는 <계상정거도> 외에도 <무봉산중도>, <풍계유택도>, <인곡정사도> 등 겸재의 진경산수화 네 폭이 실려 있습니다.     

    


왜 천원 권 지폐 뒷면에 이 작품을 실었을까요? 바로 그림 속 건물 안에 앉아 있는 선비가 바로 퇴계 선생으로 믿어지기 때문입니다. 이 그림은 겸재가 71세 때 그린 겁니다. <계상정거>란 말 그대로 냇가에서 조용히 머문다는 뜻으로, 여기서 흐르는 물은 낙동강이고 소나무 언덕 사이에 고즈넉하게 지어진 두 칸짜리 건물은 바로 도산서원입니다.     


지금은 말할 수 없이 규모가 큰 관광지로 변모해 조금은 눈살을 찌푸리게도 합니다만, 그림 속 도산서원은 퇴계 선생이 실제로 기거하던 초창기 도산서당의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일각에서는 도산서원이나 도산서당이 아니라 퇴계 선생이 58살 때 머물렀던 ‘계산서당’이며, <퇴우이선생진적> 발문 내용을 인용해 퇴계가 책을 읽는 것이 아니라 <주자서절요>의 서문을 쓰고 있는 모습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고결하고 청빈한 선비의 삶에 참 잘 어울리는 단아한 정취를 저리도 멋스럽게 그려낼 줄 알았던 겸재의 솜씨가 빛을 발하는 작품입니다. 유홍준 교수도 《화인열전》에서 겸재 만년을 대표하는 명작으로 꼽으며 “과연 신들린 작품만 같다.”라고 극찬했습니다. 대가는 대가를 알아볼 줄 안다고 했던가요. 퇴계 선생을 흠모했던 겸재의 그 마음마저 절절히 전해오는 듯합니다. 우리나라 화폐 역사에서 앞뒷면에 동일 인물이 두 번 등장한 건 퇴계 선생이 처음입니다.     



오천 원권을 장식한 인물은 퇴계 이황과 함께 조선 중기의 대학자로 꼽히는 율곡 이이(李珥, 1536∼1584)입니다. 화가는 앞서 퇴계 선생 표준영정을 그린 이유태의 스승이었던 이당 김은호입니다. 얼굴 왼쪽에는 율곡 선생이 태어난 강릉 오죽헌이 자리하고 있고, 그 뒤로 하늘로 쭉쭉 뻗은 대나무가 그려져 있습니다. 뒷면에는 좌우로 그림 두 점이 나란히 붙어 있습니다. 율곡 선생의 모친인 사임당 신 씨(1504~1551)의 작품입니다. 엄밀하게 말하면 사임당이 그렸을 것으로 추측되는 작품이지요.     


이 그림들은 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8폭짜리 병풍 <신사임당초충도병(申師任堂草蟲圖屛)>의 세 번째와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돼 있고 지금은 오죽헌/시립박물관에 가면 볼 수 있는데요. 아무래도 지폐 도안을 고르는 과정에서 율곡 선생과 연관된 것으로 모친인 사임당의 그림만 한 게 없었을 겁니다. 사실 사임당의 것으로 전해지는 작품이 진짜 사임당이 그린 게 맞는지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많습니다. 그 흔한 낙관도 없이 그저 옛사람들의 증언에만 기대야 하는 까닭입니다. 이런 당혹스러움은 뒤에 오만 원 권에서도 되풀이됩니다.     



지폐 뒷면 왼쪽에 짙은 색으로 인쇄된 그림은 수박을, 오른쪽에서 희미하게 뒤를 받치는 그림은 맨드라미를 묘사했습니다. 여성 특유의 온화하고 섬세한 묘사가 고운 색채와 어우러져 역시 사임당이야 하는 감탄을 자아내는 그림들입니다. 조선 숙종 때의 문신 정호(鄭澔, 1648∼1736)도 병풍 가장자리에 붙어 있는 발문에서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벌레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 같음과 풀포기들의 향기롭고 깨끗해 보임이 어떻게 핍진한지 그야말로 저 이른바 하늘 조화를 빼앗았다는 그것이 아닌가 싶었다.”     


그래서 오늘날 사임당의 그림으로 전해지는 초충도가 제법 많습니다만, 문제는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가짜인지 판별하기가 곤란하다는 점입니다. 다만 분명한 건 사임당의 초충도가 한 시대를 풍미할 만한 어떤 수준을 보여줬고, 그래서 사임당 사후에 수많은 모작과 위작이 양산됐고, 오늘날 진작과 위작이 사임당의 작품으로 뭉뚱그려져 전해지고 있다는 사실이겠지요. 신사임당 하면 많은 사람이 풀과 벌레 그림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이유입니다.     



세종대왕 초상 옆으로 펼쳐진 산수화 한 폭이 눈길을 끕니다. 일월오봉도(日月五峯圖), 또는 일월오악도(日月五岳圖)라 불리는 궁중회화 작품입니다. 제목 그대로 해와 달과 다섯 봉우리를 한 화폭에 그렸지요. 왕이 앉는 용상 뒤에 설치됐으니까 왕이 자리에 앉으면 왼편으로 붉은 해가, 오른편으로 흰 달이 떠 있는 모양새가 됩니다. 가운데 봉우리를 중심으로 화면 왼쪽과 오른쪽이 대칭을 이루고 있고, 해와 달의 위치는 물론 폭포가 시작돼 물줄기가 떨어지는 지점에 파도와 소나무의 색깔과 무늬까지 엄격하게 도식화된 형식적 틀에 따라 그려졌습니다.     


중국이나 일본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특한 궁중회화 양식인데, 그 유래나 각각의 도상이 가진 의미를 밝혀줄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는군요. 일부 학자들은 <시경(詩經)>에서 유래했다고도 했고 일각에선 음양오행(陰陽五行)의 원리로 풀이하기도 하지요.     


제가 지금까지 읽은 가장 명쾌한 해설은 미술사학자인 고 오주석 선생의 책에 나옵니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해는 양(陽)으로서 아버지처럼 굳세고 일관되게 나아가는 덕을 뜻하고, 달은 음(陰)으로서 어머니처럼 자애롭고 모든 것을 포용합니다. 다섯 봉우리는 인간이 갖춰야 할 인(仁), 예(禮), 신(信), 지(智), 의(義)의 다섯 가지 덕을 상징합니다. 폭포가 쏟아져 내리는 곳에선 물보라가 생기 넘치고, 상서로운 소나무는 선명한 색으로 찬란하게 빛납니다. 조선 건국의 이념과 이상이 심오하고 빼어난 상징으로 그림 안에 극명하게 녹아들었다는 게 오주석 선생의 결론입니다.     



일월오봉도는 궁중회화이기 때문에 조선시대 왕실 직업 화가인 도화서 화원들이 그렸습니다. 그래서 화가가 누군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이 작품은 삼성미술관 리움의 소장품으로 2011년에 열린 <조선화원대전>에서 일반에 공개된 바 있는 여덟 폭짜리 병풍입니다. <일월오악도 8곡병>이란 제목이 붙어 있고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 작품으로 추정됩니다. 가로 365.5, 세로 162.5 센티미터로 크기가 상당할 뿐만 아니라 완성도도 높아서 현재 남아 있는 일월오봉도 가운데 대표작으로 꼽힙니다.     


일월오봉도는 왕을 위한, 왕을 상징하는 그림입니다. 만약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영화나 드라마에서 왕의 뒤편에 이 그림이 없으면 틀림없이 왕이 아니거나 고증이 잘못된 겁니다. 심지어 왕이 세상을 떠나면 그림을 떼어내 같이 묻었을 정도입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는 왕이 있는 곳뿐 아니라 왕이 세상을 떠나 장례를 치르는 동안 신주를 모신 곳에도, 심지어 왕의 초상화가 있는 곳에도 어김없이 일월오봉도가 설치됐습니다.  경복궁 근정전 내부를 들여다보면 왕의 자리인 용상 뒤에 일월오봉도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고, 왕의 초상화를 모셨던 진전(眞殿) 중 한 곳인 창덕궁 신선원전 감실 안에도 일월오봉도가 그려져 있는 걸 확인할 수 있습니다.     



가장 최근에 만들어진 고액권인 오만 원권 지폐의 주인공은 신사임당입니다. 이 표준영정은 이당 김은호 화백의 제자인 한국화가 이종상(1938~) 화백의 작품입니다. 여기서 눈에 띄는 건 역시 화면 중앙을 수놓은 포도 그림입니다.


이 그림이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굳게 믿어지는 까닭은 조선 후기 최고의 그림 수집가였던 석농 김광국(金光國, 1727∼1797)의 전설적인 화첩 <석농화원(石農畵苑)>의 ‘습유’ 편에 바로 이 작품이 <수묵포도>란 제목으로 실려 있고 조선 후기의 문장가 동계 조귀명(趙龜命, 1693~1737)의 다음 글이 인용돼 있기 때문입니다. “우계(성혼)와 율곡이 나란히 유림에서 우뚝하고, 청송(성수침)의 글씨와 신부인(신사임당)의 그림이 또 빼어난 예술로 세상에 이름이 났으니, 또 기이한 일이다.”     


이 정도로 못을 박은 걸 보면 그림이 진품이라는 걸 단단히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원작을 보면 포도알이 익은 정도에 따라 먹의 묽기를 달리해서 생동감을 기가 막히게 살리고 있습니다. 다만 지폐 속 그림을 보면 원작에는 없는 색채를 가미한 것이 특징적입니다.     



포도 그림 뒤로 그림자처럼 모습을 드러낸 그림이 또 한 점 보이지요. 역시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자수 초충도 병풍>입니다. 보물 제595호로 지정된 이 유물은 동아대학교 석당박물관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여덟 폭 병풍 가운데 지폐에 녹아든 그림은 일곱 번째 가지 그림입니다. 앞서 오천 원권 지폐에서도 언급했습니다만 현재 신사임당의 작품으로 전해지는 것들은 하나같이 그렇다고 믿어지는 것들입니다. 즉 확고한 증거가 없다는 뜻입니다. 오죽했으면 간송미술관의 백인산 연구실장조차 자신의 저서 《간송미술 36: 회화》의 첫머리에 사임당의 포도 그림을 소개하고도 지면의 대부분을 이런 곤란한 상황을 설명하는 데 할애했을까요.

     

참 어려운 문제입니다. 그런데 만약 신사임당의 작품이 아니라는 데 무게 중심을 두면 우리 회화사의 커다란 알맹이가 일거에 사라지고 맙니다. 게다가 이미 사임당의 작품을 무려 네 점씩이나 지폐에 새겨 넣었으니 말입니다. 전문 화가도 아닌 사임당이 우리 지폐에 가장 많은 작품을 등장시킨 주인공이라는 사실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어쨌든 백인산 실장은 사임당의 <포도>를 설명한 글의 말미에 이런 심정을 토로했습니다.     


그녀의 작품이 들어가야 했다면, <포도> 외에 마땅한 대안은 없었을 것이다. 학술적인 안목으로 냉정하게 평가한다면 주저되는 바가 없지 않지만, 이 대목에서는 조금 너그러워지고 싶다. 이 그림마저 아니면 신사임당의 그림은 더욱 자취를 찾기 어려워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써는 3백 년 전 문인들의 말에 기대어 보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오만 원권 지폐의 뒷면을 세로로 세워놓고 보면 매화가 하늘을 향해 곧은 가지를 뻗어 올린 그림을 만나게 됩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화가였던 어몽룡(魚夢龍, 1566~1617)의 <월매도(月梅圖)>란 작품입니다. 수직으로 가장 높이 솟은 가운데 가지 왼쪽에 둥근 달이 어렴풋하게 존재를 드러내고 있지요. 어몽룡은 매화를 잘 그려서 일지(一枝)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다지만, 당대 중국인들은 혹평을 서슴지 않았다고 합니다. 중국이 주도하는 전형적인 매화 그림의 유행에서 벗어나 있었다는 이유로 말이지요. 거꾸로 얘기하면 중국식이 아니라 조선의 독자적인 양식으로 그렸다는 뜻이 됩니다.     


<조선 회화를 빛낸 그림들>의 저자 윤철규 씨는 이 작품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했습니다. “어몽룡이 그린 매화에는 강하고 거친 가운데 꾸밈이 없는 담백한 서정적 분위기가 담겨 있습니다. 이런 특징은 바로 이후에도 여러 면에서 보게 되는 한국의 미적 특징 중 하나입니다.” 이런 회화사적 의미를 찾을 수 없었다면 굳이 이 작품을 지폐에까지 싣지는 않았을 테지요.     



우열을 가리자는 뜻은 아닙니다만 오만 원권 지폐 뒷면 그림을 고른 분들이 어째서 탄은 이정의 <풍죽>을 어몽룡의 매화 그림 뒤에 보일 듯 말 듯 그려 넣었는지 모르겠습니다. 탄은 이정(李霆, 1554~1626)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최고의 묵죽화가로 평가받는 분입니다. 왕족 출신 화가로 임진왜란 당시 오른팔이 거의 잘려 나갈 뻔했던 고된 역경을 딛고 우리 회화사에 기념비적인 걸작들을 남긴 그 기구했던 사연까지 더해져 더 우러러 보이는 인물이지요.     


대나무 가지에 매달린 잎이 세찬 바람을 맞은 기세와 역동성을 강렬하게 포착해낸 이 작품은 최고의 묵죽화가가 그린 최대 걸작으로 꼽힙니다. 대나무 잎에서 마치 바람 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습니다. 간송미술관의 백인산 선생 역시 이 작품에 극찬을 아끼지 않았죠.     


조선의 묵죽을 실제 작품으로 감상할 수 있는 것은 탄은 이정에 이르러서이다. () 그가 묵죽에서 이루어 낸 성취는 조선 묵죽의 본격적인 시작과 양식적 정체성이 확립을 동시에 보여 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자못 크다. <풍죽>은 탄은의 묵죽 중에서도 최상의 격조와 절정의 기량을 갖춘 백미라 할 수 있다.”      


2015년 여름, 간송문화전 네 번째 전시에서 이 작품을 직접 만나는 행운을 얻었는데, 그런 기회가 또 언제 다시 올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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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자세하게 설명하려는 욕심에 꽤 긴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관심 때문에 기대감을 안고 읽은 신간 《지갑 속의 한국사》에는 그림에 관한 내용은 거의 없습니다. 이 책은 지폐 속 인물들의 생애와 업적을 청소년들의 눈높이에 맞춰 쓴 교양서입니다. 그래서인지 쉽게 읽히기는 하지만 새로운 내용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저자가 지폐 속 인물들의 체취가 서려 있는 문화유산 현장들을 직접 답사했다는 출판사의 홍보문구와 달리 글이나 사진에서는 정작 답사의 노고가 전혀 감지되지 않습니다. 답사의 흔적이 안 보이는 답사기라고 할까. 표지 상단에 적힌 문구를 보고는 괜한 기대를 했나 싶더군요. 가뿐하게 읽는 역사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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