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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an 31. 2020

명나라 황제에게 바쳐진 비운의 조선 여인들

서인범 《자금성의 노을》(역사인, 2019)

조선 초기 26년간, 114명의 조선 처녀들이 공녀라는 이름으로 명나라 황실에 바쳐졌다이 가운데 16명은 황제의 후궁이 되었다그리고 이들 16명 중 두 여인은 특이하게도 같은 부모 밑에서 나고 자란 자매 사이였다.”     


영화가 시작하기 전 자막으로 등장할 법한 이 구절. 거짓말 같지만 실제로 일어난, 아프고도 부끄러운 우리 역사입니다. 힘없는 나라가 힘센 나라를 섬기는 약육강식의 냉엄한 국제 질서 속에서 명나라는 조선에 처녀를 바치라고 대놓고 요구합니다. 물건을 바치면 ‘공물’이었고, 처녀를 바치면 ‘공녀’라 했습니다.     


이런 전통(?)은 고려 시대에도 있었습니다. 고려 여인들이 원나라로 뽑혀가 궁인(宮人)이 되었다죠. 원나라는 하루가 멀다고 고려에 미녀를 바치라고 요구합니다. 원이 멸망하고 명이 들어섰어도 그 몹쓸 전통은 사라지지 않았죠. 일정 나이의 양가 처녀들을 전국에서 뽑아 올려 심사를 했습니다. 몰래 결혼이 폭발적으로 늘고, 처녀를 숨기는 일도 비일비재했다고 합니다.     


   


책을 읽다 보면 분노를 감추기 어렵습니다. 정상적인 국가 간 외교에서 과연 있을 법한 일인가. 고작 13살밖에 안 된, 지금으로 보면 초등학교 6학년 나이의, 처녀라기엔 너무도 어린 나이에 하루아침에 부모 형제와 생이별을 하고 낯설고도 먼 나라에서 숨죽여 살아야 했겠지요. 그 가혹한 운명을 차마 거스르지 못한 채, 통곡하는 엄마 아빠를 목놓아 부르며 머나먼 타향으로 팔려 가는 가련한 제 신세를 한탄할 수밖에 없었겠지요. 

    

그중에서도 언니와 동생이 차례로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된 사연은 더 기가 막힙니다. 태종 17년(1417)에 선발돼 명나라에 바쳐진 한 씨는 명나라 세 번째 황제인 영락제(永樂帝, 1360~1424)의 마음을 얻어 후궁이 됩니다. 명나라 황제의 후궁이 돼 여비(麗妃)라는 이름으로 역사에 남은 조선 여인 한 씨는 황제가 죽자 순장됩니다. 가슴 아픈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유모나는 가오유모나는 가오.”     


아직 그 이름도 나이도 아직 밝혀지지 않은 한 씨는 이렇게 한 많았던 생을 허무하게 마감합니다. 명나라 황실에서 순장의 악습이 사라지기까지는 그 뒤로도 꽤 시간이 흘러야 했죠. 우리의 조선 초에 해당하는 그 시기까지도 순장이 이뤄졌다는 사실은 자못 충격적입니다. 김훈의 소설 《현의 노래》에 처절하게 묘사된 그 떼죽음의 굿판이 먼 고대의 이야기가 아니었다니….     


명나라 제5대 황제인 선덕제


여비의 죽음보다 더 기막힌 사건은 그 뒤에 일어납니다. 명나라 5대 황제인 선덕제(宣德帝, 1399~1435)는 즉위하자마자 조선의 어린 여자를 요구합니다. 세종 9년(1427)에 추가로 간택된 처녀 가운데 한 씨가 있었습니다. 명나라 황제와 함께 순장된 언니 한 씨의 막내 여동생이었죠. 여인의 이름은 한계란(韓桂蘭). 당시 18살로 적지 않은 나이였음에도 동생 역시 언니의 전철을 밟는 얄궂은 운명에 희생되고 맙니다. 저자는 이 대목을 또다시 가슴 아프게 묘사했습니다.     


언니 한 씨가 영락제의 후궁이 되었다가 순장 당한 것만도 애석한 일이었는데이제 동생이 또 가는구나.”  

   

저자는 한계란이 선덕제의 후궁이 되어 명나라와 조선의 외교에서 적잖은 역할을 했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당시 최고 권력자로 이름을 날린 한명회가 바로 한계란의 집안이었죠. 조국에서 공녀로 팔려 가 후궁이 된 조선 여인의 일가친척은 명나라 조정으로부터 극진한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 부담을 시시때때로 나눠서 져야 했던 조선 조정으로서는 엄청난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겠죠.     


꽃다운 나이에 눈물 콧물 쏟으며 다른 나라로 팔려 간 여자가 어느 날 황제의 후궁이 되어 막후에서 외교 문제를 조율하는 역할을 한다?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실록》이라는 조선 왕조의 공식 기록물에 적힌 대로라면 한계란과 그 일족은 조선에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습니다. 공녀(貢女)의 역사에는 이렇게 상반된 빛과 그늘이 함께 드리워져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란이 개입한 외교 성과 가운데 특히 주목되는 건 수우각(水牛角), 즉 물소의 뿔 수입량을 늘리는 데 이바지했다는 대목입니다. 물소의 뿔은 당시 최고급 활을 만드는 재료였습니다. 국내에서는 생산되지 않아 전량 수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죠. 그런데 명나라는 시원하게 물량을 내주지 않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찾아보면 물소의 뿔을 수입하는 문제로 임금과 신하들 사이에 수없이 많은 대화와 토론이 이뤄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김시 <야우한와>, 조선 16세기, 비단에 엷은 채색, 14.0×19.0㎝, 간송미술문화재단


실록의 내용을 읽어보면 조선의 화가들이 물소를 그릴 수 있었던 까닭도 자연스럽게 이해됩니다. 실제로 다른 나라에서 물소를 조공으로 바친 사례가 꽤 많았고, 물소를 토착화하기 위해 수입해다가 직접 사육했던 기록도 남아 있습니다. 어느 해에는 임금이 신하들에게 물소를 나눠주고 길러보라고까지 했죠. 이 땅에는 없는 짐승을 조선의 화가는 일상 속에서 어렵지 않게 관찰할 수 있었던 겁니다. 뭣도 모를 때는 어리석게도 중국의 화보를 보고 그린 것으로만 생각했죠.     


하지만 사육 물소는 활을 만드는 재료인 수우각을 얻는 데는 끝내 별 도움이 안 됐던 것 같습니다. 심지어 농사일에도 쓸모가 없어 나중에는 골칫거리로 전락했다고 하죠. 결국, 수입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었던 겁니다. 그러니 명나라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없었죠. 조선 정부는 수입 물량을 늘리기 위해 끈질긴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고, 한계란의 측면 지원에 힘입어 성종 12년(1481)에 기존 50부에서 150부로 세 배 늘어난 물량을 수입할 수 있게 됩니다. 수우각 무역에 얽힌 다채로운 기록들은 별도의 연구 주제로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한계란은 태종 10년(1410)에 4월 9일에 태어나 성종 14년(1483) 5월 18일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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