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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04. 2020

‘작가의 말’로 본 박완서라는 작가

박완서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작가정신, 2020)

박완서의 장편 데뷔작 《나목》을 읽은 기억을 떠올립니다. 책의 표지로 쓰인 그림이 박수근의 1962년 작 <나무와 두 여인>이었습니다. 제가 읽은 건 민음사 판이었는데, 이번에 새로 나온 책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에는 1976년 열화당 판과 1985년 중앙일보사 판과 1990년 작가정신 판에 각각 수록된 작가 후기가 나란히 실려 있습니다.     



정식으로 작가 수업을 받은 적 없는 늦깎이 신인의 장편 데뷔작이라는 점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한국을 대표하는 화가 박수근의 생애를 다뤘다는 점에서 《나목》은 발표 초기부터 지금까지 줄곧 많은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연히 작가와 화가의 인연에 관한 질문이 쏟아졌죠. 그래서 작가는 판을 거듭할 때마다 작가 후기에 그 이야기를 언급해 놓았습니다. 소설은 소설일 뿐이라고. 이미 잘 알려진 사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작가가 《나목》을 쓰게 된 동기는 뜻밖에도 1977년 열화당에서 낸 소설집 《창밖은 봄》의 서문에 나옵니다.     


신동아에서 한 논픽션 모집을 보고 내가 한때 알고 지낸 일이 있는 박수근 화백의 전기를 써보고 싶단 생각을 했다그보다 앞서 그분의 유작전을 보고그분의 그림값이 사후에 엄청나게 뛴 걸 알았을 때의 착잡한 심정도 있고 해서꼭 그분이 가장 빈궁했을 때의 모습을 증언해야겠다는 사명감을 걷잡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막상 쓰기 시작하고 보니사실을 증언해야 하는 논픽션에서 나는 자주자주 거짓말을 시키고 있었고거짓말을 시킴으로써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나는 깜짝 놀라면서 황급히 거짓말 부분을 깎아내고 사실을 충실하려고 애썼지만 사실만 가지곤 도저히 그분을 살아 움직이게 할 수가 없었다.     


드디어 나는 사실을 쓰기를 포기하고 마음대로 거짓말을 시키기로 작정했다그것은 내가 거짓말의 유혹에 넘어간 게 아니라허구로써 오히려 내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을 진실에 가깝게 그릴 수 있다는 소설의 초보를 체득했기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된 게 처녀작 나목(열화당 )이었고 거짓말이기 때문에 논픽션에 응모할 자격으로 자동적으로 상실한 셈이었으니여성동아의 여류 장편소설 모집에 응모해서 당선됐다그게 1970년 10월의 일이다.”     


논픽션으로 시작해보자던 것이 결국 소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입니다. 출발이나 과정은 어찌됐든 박완서는 소설을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이고, 《나목》은 태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며, 박완서는 소설가가 될 수밖에 없었던, 어떤 작가적 운명을 예감케 하는 일화로 저는 받아들였습니다.     


생전에 박완서 작가를 딱 한 번 취재 현장에서 뵌 일이 있습니다. 2010년 3월에 화가 김점선 1주기 행사를 취재하러 간 자리에 역시 지금은 고인이 된 박완서 작가가 왔더군요. 두 사람 사이에 각별한 인연이 있다고 했습니다. 이 책에서 김점선의 존재가 등장하는 작가의 글은 두 편입니다. 2004년 이가서가 펴낸 동화집 《보시니 참 좋았다》의 삽화, 2007년 문학과지성사가 펴낸 소설집 《친절한 복희씨》의 표지가 김점선 화백의 솜씨였습니다. 당시 한사코 인터뷰를 사양하는 작가를 간신히 설득해서 ‘말씀’을 받아낸 기억이 납니다.     


"화가로서보다는 내 친구였고 좋은 글이 나중에 작가가 죽은 후에도 위안을 주듯이 그의 그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뒤로 유일하게 읽은 박완서의 소설이 지금까지도 《나목》 하나라는 사실은 새삼스럽습니다. 그러니 작가에 관해 제가 아는 것은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죠. 물론 《프롤로그 에필로그 박완서의 모든 책》을 읽었다고 해서 작가에 대해 갑자기 잘 알게 되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런데도 이 책을 덮는 순간 저는 박완서라는 작가의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머릿속에서 그려볼 수 있을 것 같더군요.     


솔직히 작가의 말에 이토록 작가의 생각과 감정을 더듬어볼 수 있는 것들이 많이 남아있을 줄은 몰랐습니다. 박완서는 자신을 어떤 식으로도 잘 꾸밀 줄 모르는 순박하고 진솔한 마음의 소유자였던 것 같습니다. 때론 그런 솔직담백함이 지나친 겸손으로 읽힐 수도 있겠다 싶지만, 수십 년에 걸쳐 ‘작가의 말’이 만들어낸 ‘작은 역사’를 일별하고 나면 작가의 천성이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되더군요.     


이 책은 박완서라는 한 작가의 역사이자 한 시절 문학과 동거했던 이의 절절한 자기 고백입니다. 동시에 한국 현대 문학사, 더 나아가서는 한국 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에 관한 한 문학가의 증언이기도 하고요. 작가의 말을 모아서 책을 내겠다는 생각은 옳았습니다. 책에 실린 작가 연보와 작품 연보, 책 표지까지 읽고 나니 박완서의 모든 작품을 섭렵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이 책에 수록된 마지막 작가의 말은 2010년 현대문학에서 펴낸 산문집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의 서문입니다. 그해 나이 여든이었죠. 작가는 이듬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직도 글을 쓸 수 있는 기력이 있어서 행복하다쓰는 일은 어려울 때마다 엄습하는 자폐(自斃)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구하고내가 사는 세상에 대한 관심과 애정을 지속시켜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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