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14) 서울옥션 11월 경매 출품작 프리뷰
당대 최고의 무용수로 이름을 날린 최승희는 한 시대를 들었다 놨다 한 불세출의 무용수답게 화가들로부터도 많은 사랑을 받았다. 최승희를 모델로 한 그림이 적지 않은 이유다.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에서 열린 「신여성 도착하다」 전에서 일반에 처음 공개된 <무당춤을 추는 최승희>(1941)라는 작품이 많은 관심을 받았다. 제목을 모른 채로 보면 최승희를 모델로 한 것인가 싶을 정도로 이채로운 표현이 눈길을 끈다.
이 그림을 그린 이는 일본 교토 출신 화가 우메하라 류자부로(梅原龍三郞, 1888~1986). 우메하라는 프랑스 유학 시절 르누아르의 작품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르누아르를 직접 찾아가 그림을 배웠다. 5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귀국한 우메하라의 그림은 공개되자마자 큰 화제를 불렀다고 한다. 일본화와 서양화의 재료, 기법, 정신을 광범위하게 흡수해 독자적인 화풍을 연 우메하라는 야스이 소타로(安井曾太郞)과 함께 쇼와(昭和)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으로 자리매김한다.
국립현대미술관 전시에서 본 이 그림이 서울옥션 11월 경매에 나왔다. 세로 86.7cm, 가로 51cm로 종이에 채색한 인물화로는 크기가 상당하다. 왼쪽 아래 용(龍)이라는 인장을 찍었다. 이번 경매에서 단연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경매 시작가는 2억 원.
만년에 난만하게 꽃 핀 김환기의 전면점화 또한 이번 경매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전면점화의 완숙기로 꼽히는 1972년 작으로, 얼마 전 크리스티 경매에 출품된 전면점화와 더불어 가로가 긴 전면점화는 김환기 작품 전체를 통틀어 넉 점 정도에 불과해 희소하다. 김환기는 청색을 주조로 전면점화에서 여러 색을 다양하게 구사했는데, 이 작품은 푸른 바다를 떠올리게 하는 청록색의 화면이 또 다른 매력을 발산한다. 세로 48.1cm, 가로 145.3cm로 전면점화 중에선 아담한 편이지만, 작품이 뿜어내는 아우라는 여느 작품 못지않게 강렬하다.
서울옥션 관계자는 “김환기의 작품은 경매에서 거래된 한국 회화 최고가의 1위부터 10위까지를 모두 차지하며 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되고 있지만, 한국 미술사에서 작가의 위상과 평가는 이러한 기록만으로는 모두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높다”라며 “이처럼 미술사적 가치가 탄탄한 김환기의 작품이 올해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큰 관심을 받고 있기 때문에 이번 출품작에 대해서도 많은 미술 애호가들의 눈길이 이어질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경매 추정가는 24억 원에서 40억 원.
경매에 출품된 김환기의 작품 가운데 또 하나 눈여겨볼 것이 1950년대 중반에 그린 <하늘>이란 작품이다. 빈티지 느낌이 물씬 풍기는 액자 뒷면에 적힌 글귀를 보면, 파리에 체류하던 1958년 3월 28일에 김환기가 세 자녀에게 그려줬음을 알 수 있다.
멀리 타향에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생각하며 가만히 붓을 놀렸을 화가의 모습을 떠올려본다. 화면을 반 이상 채운 커다란 보름달이 어두운 밤을 환하게 비춰주니 파리에서 서울까지 그 아득하게 먼 거리를 힘차게 날아갈 새들의 여행은 외롭지 않을 것이다. 그런 그리움이 담긴 사랑스러운 그림이다.
서울옥션 강남센터 5층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작품이 바로 데이비드 호크니의 아이패드 드로잉을 크게 인쇄한 에디션 작품이다. 호크니는 영국과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만년에는 고향 요크셔에 주로 머물며 작업했다. 익히 알려졌다시피 호크니 예술을 대표하는 풍경화는 대부분 고향에서 완성한 것으로, 이 작품의 제목에도 보이는 월드게이트를 비롯해 요크셔 지방 곳곳이 호크니 그림의 배경이 됐다.
아이패드로 그린 그림을 크게 인쇄해서 한정판 에디션으로 판매한다는 개념 자체가 의외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지만, 호크니의 작품을 원화로 구매하는 일이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시장에서는 그것도 가능하겠구나 싶다. 줄기가 잘려 나간 나무의 초상이라 해도 좋을 이 그림의 풍부한 색감을 보면 왜 동시대 화가들이 호크니, 호크니 하는지 알 수 있다. 월드게이트에 찾아온 봄을 저토록 상쾌하게 그려낼 줄 아는 호크니야말로 진정한 색채의 화가라 불릴 만하다. 경매 추정가는 1억 4천만 원에서 2억 5천만 원.
한국 작가 작품으로는 노은님의 <깊은 바다속>(2011)과 <무제>(2000)를 눈여겨볼 만하다. 노은님의 작품은 아주 조심스럽게 시장에 한두 점씩 꾸준히 소개되고 있는데, 아직 시장의 반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전시장에서 <깊은 바다속>과 나란히 걸린 호주 작가 조르디 커윅의 작품과 비교해도 전혀 꿇리지 않는 조형성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는 노은님의 그림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 온당하게 평가받는 날이 오리라.
한국 작가의 작품으로는 요즘 새롭게 눈여겨보고 있는 변시지의 <기다림>과 <귀로>, 농원의 화가 이대원의 <Chest>(1965)와 <청평강․산>(1968), 도상봉의 1969년 작 <고궁지변>, 강요배의 2004년 작 <풍경> 등이 주목된다. 작가 사후 에디션으로 나온 파블로 피카소의 태피스트리도 놓치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