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15) 임순남 <모두의 얼굴>
작은 방에 사람들이 모였다. 두어 평이나 될까. 사방은 온통 흰 벽이고, 방 가운데 의자 하나가 덩그러니 놓였을 뿐. 방에 들어오는 손님을 가장 먼저 맞아주는 사람은 눈이 부리부리한 어느 노인. 긴 세월의 흔적이 얼굴에 주름으로 내려앉았지만, 노인은 얼마 남지 않는 시간에 선선히 자신을 내어줄 생각이 없다. 그 표정은 결연하다. 평범한 듯 보이는 노인의 얼굴은 보면 볼수록 비범한 느낌을 준다. 캔버스라는 커다란 거울을 노인은 뚫어져라 바라본다.
임순남은 인물화를 그린다. 정물도 그리고, 풍경도 그렸지만, 인물화를 가장 오래, 그리고 진지하게 탐구하고 그려왔다. 임순남의 인물은 대상의 재현이 아니다. 화가는 직접 관찰한 인물의 형상에 자기 상상력을 보태 그린다. 속도감 있는 붓질로 형태를 잡고, 몇 가지 색만으로 의도한 색감을 표현한다. 최근 임순남은 육신의 취약성과 유한성에 주목한다고 했다. 멍 자국이 있는 아픈 사람, 노쇠한 몸을 가진 노인. 화가는 그들의 얇아진 피부 주름 사이로 세월을 그려 넣는다. 언젠가 맞닥뜨릴 화가 자신의 모습이기도 하다. 임순남의 시선은 회화라는 매개를 통해 자신에게서 타인에게로 확장된다.
“얼굴은 비언어적 자기표현 그 자체로 언제나 흥미롭다. 이번 전시에서 휴식을 취하는 병사, 연장자, 그리고 박서보 작가님의 프로필 이미지를 차용하여 새로운 작업을 하였다. 얼굴이 드러내는 신체성, 시간에 대한 감각, 그리고 심리적 특성에 주목하면서 신문 캔버스의 재질감과 미감을 탐구하며 작업을 하였다.
이 작업들은 고 박서보 작가님께서 마련해두신, 한지와 신문지를 곱게 배접한 캔버스에 그린 것이다. 회화에 있어 어떤 바탕이냐는 이미 작업의 방향을 섬세하게 고려해 둔 것이다. 그러하기에 그 캔버스의 고유한 미감 위에 무엇을 얹을 수 있을지에 대한 부담감이 들었고, 여러 시행착오를 거쳤다. 작가님께서 그러셨던 것처럼 젯소를 가볍게 칠하였다. 그림을 얹기에 더 적합하게 바닥을 정돈한 것이다. 보다 균일해진 바닥에 회화라는 메디움은 보통의 캔버스보다 물감과 기름이 빚어내는 물성이 더 도드라지게 미끄러지듯이 얹히는 특색이 있다.”
아트베이스 26SQM이라는 불리는 작은 방에 걸린 인물화는 11점. 말 그대로 작은 방이라 더 많은 그림을 걸 수는 없다. 대신 한 쪽 벽에 붙은 커다란 모니터에서 화가가 그동안 만나온 더 많은 얼굴을 만날 수 있다. 코로나 유행이 한창이던 2021년 6월, 연희동 전시공간 플레이스막 2에서 열린 임순남의 개인전 <매일의 감각> 전시 도록을 한 장 한 장 이미지로 바꿔 보여준다. 화가가 오랫동안 그려온 ‘어떤 얼굴’ 시리즈를 비롯해 뉴스 이미지를 토대로 한 인물 작업, 몽골 여행에서 만난 현지인들의 얼굴 작업, 그리고 커미션 작업인 조부모 초상, 정물, 풍경, 드로잉까지 화가의 예술 세계가 일목요연하게 담겼다. ‘어떤 얼굴’ 시리즈 가운데 2013년 작 5점이 수원시립미술관에 소장됐다.
“축적된 시간성이나 시간의 간극에 존재하는 것들, 이를테면 삶과 죽음, 여름과 겨울, 초록의 잎과 바짝 마른 잎, 부드러운 피부와 주름지고 그늘진 피부. 또한, 병이나 사고 등으로 피멍이 들거나 부분적으로 단절되고 대체된 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신체의 취약성을 드러내는 대조적인 것들의 공존에서 오는 아름다움과 고통, 그리고 슬픔 등이 빚어내는 멜랑콜리함이 주는 미감에 주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