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26) 이규일 <뒤집어 본 한국미술>(시공사, 1993)
몇 해 전 광주 처가에 간 김에 미디어아티스트 이이남 작가 만나러 이이남스튜디오에 갔다가 책을 한 권 얻어왔다. 그 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미술기자 이규일의 <화단야사 2: 한국미술의 명암>이다. 미술책을 읽다 보면 자주 인용되는 주요 참고문헌 가운데 하나. 집에 가져와서 책장에 꽂아둔 뒤로 내내 잊고 있다가 최근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이제 읽어야겠다 싶어 뽑아 들었다. 하지만 제목에서 보듯 이보다 앞서 1권이 있었으므로 순서대로 읽자는 생각에 헌책방에서 1권을 구했다. <뒤집어 본 한국미술>이다. 시공사가 1993년에 초판을 냈다.
말 나온 김에 시공사라는 출판사를 잠깐 언급해야겠다. 미술 전문 출판사가 아닌데도 양질의 미술책을 꾸준히 내는 대표적인 곳이 바로 시공사다. 내 미술 스승이신 황정수 선생님이 미술사학자 김상엽 씨와 함께 엮은 책 <경매된 서화>만 봐도 알 수 있다. 전공자나 연구자가 아니면 읽지 않을 이런 비상업적인 책을 기꺼이 맡아 내줄 출판사가 몇이나 되겠는가. 시공사가 한국 미술사 연구에 이바지한 공로를 간과해선 안 된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간다. 우리 근현대 미술사에 이름 석 자를 깊이 새긴 뛰어난 미술기자로 이구열 선생과 더불어 이규일(1939~2007) 선생을 꼽는다. 이분들은 미술 문화와 제도 자체가 허약하고 척박하던 시절에 미술 현장을 누빈 미술 전문 기자다. 오랜 취재 경험을 토대로 한국 미술사 연구에 중요한 기록을 남겼다. 방송사에 몸담은 내가 최초의 방송사 미술 전문 기자가 되길 꿈꾸면서 이분들의 발자취를 사표로 삼은 까닭은 저널리스트의 눈으로 한국 미술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해 남겼기 때문이다. 그 기록이 몹시도 귀하다. 이구열 선생은 생전에 찾아뵙고 인사드리고 인터뷰하고 책에 서명까지 받았지만, 이규일 선생은 안타깝게도 뵐 기회를 얻지 못했다. 아쉽고 또 아쉽다.
■‘발로 뛰는’ 글이 그립다! 故 이규일 선생을 기억하며
https://www.daljin.com/column/14610
책 머리에 이규일 선생의 서문에 이어 이경성, 이구열, 오광수, 정중헌 네 분의 추천사가 실렸다. 정중헌의 글이 좋다. 본문은 여섯 가지로 부제로 꾸며졌다. ▲화단의 파벌, 그 뿌리 ▲사건 국전 30년 ▲창작과 비평 싸움, 모방과 표절 시비 ▲역사 속의 미술인 ▲화랑과 그림 값 그리고 전시회 비화 ▲예술가의 삶과 그 주변 이야기. 미술기자가 이만한 자료를 모은 것도 놀랍거니와 그 생생한 현장 취재 기록에 혀를 내두르게 된다. 그동안 극히 단편적으로만 알던 여러 미술사적 사건의 내막을 속속들이 알게 된 것이야말로 이 책에서 얻은 가장 큰 수확이다. 미술이 이토록 뜨겁고 진지한 것이었다니. 많이 배운다.
‘미술 작품 표절 시비’를 다룬 장에 흥미로운 사례가 있어 옮겨둔다. 1984년 제7회 중앙미술대전에서 양화 부문 대상을 받은 홍창룡의 그림 <전철정류소 I>이 경향신문 서경택 기자가 잡지 레이디경향에 발표한 흑백사진 <지하철의 보통사람들>을 표절했다는 논란이 일었다. 저자는 표절 시비가 일기 전에 한 인터뷰에서 수상자가 “아내가 친구에게서 빌어온 여성잡지에 났던 사진작품을 보고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밝히고, “전철 사진을 찍어준 작가에게 고마운 뜻을 전한다.”고까지 했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중앙미술대전 심사위원들은 서경택씨의 사진작품은 흑백이고, 홍창룡씨의 미술작품은 색채화여서 작가의 말대로 아이디어의 차용으로 간주, 수상을 취소하지 않았다.”고 전했다. 책에 실린 도판을 보면 사진과 그림이 거의 똑같다는 걸 한눈에 알 수 있다.
얼마 전 나는 고려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김호석 화백의 그림 <침묵시위>(1992)와 김정헌 화백의 그림 <1965년 서울, 서울대, 한일회담 반대 데모 행렬 가운데>(2006)가 일본인 사진가 구와바라 시세이의 사진 <한일회담 반대데모>(1965)를 바탕으로 그려졌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 (https://brunch.co.kr/@kimseok7/334) 화가가 어떤 사진에서 영감을 얻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일 터. 요는 자기만의 시선과 기법으로 재해석해서 사진과는 다른 회화적 의미를 찾아내 제시했느냐 하는 점이겠다.
이제 2권을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