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27)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솔직히 놀랐다. 에곤 실레(Egon Schiele, 1890~1918)의 그림이 이렇게나 많이 왔다니. 자화상을 비롯한 인물화, 풍경화는 물론 유화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지는 에곤 실레의 드로잉이 전시장 한가득 펼쳐져 있었다. 게다가 화가의 대표작이라 해도 손색없는 좋은 작품들이 많이도 왔다. 어느새 한껏 들뜬 나는 다른 전시품들은 일단 제쳐두고 에곤 실레의 작품만 부지런히 눈에 담으며 신이 난 아이처럼 전시장을 돌고 또 돌았다.
전시장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아주는 것은 에곤 실레가 1918년 3월 1일부터 4월 1일까지 열린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를 위해 직접 디자인한 포스터다.
포스터에 보이는 탁자의 맨 윗자리를 차지한 것은 명실공히 전시의 좌장이었던 에곤 실레 자신이다. 실제로 제49회 비엔나 분리파 전시회 당시 에곤 실레는 자신의 작품을 중앙 전시관에 독점 전시했고, 언론의 찬사 속에 예술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 대단한 성공을 거둔다.
시선을 아래로 옮겨 테이블 건너 맞은편 빈 의자. 이 의자는 자신의 스승 클림트의 자리였다. 클림트는 전시회가 열리기 직전에 세상을 떠났고, 실레는 그런 스승의 빈 자리를 포스터에 그려 넣어 추모했다. 이렇게 해석할 수 있는 까닭은 실레가 같은 해에 그린 유화 <친구들(원탁)>에는 의자에 앉은 클림트의 뒷모습이 그려졌기 때문.
공교롭게도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긴 실레와 달리 클림트는 자화상을 단 한 점도 남기지 않았다. 스승과 제자가 여러 면에서 아주 달랐음을 보여주는 상징처럼 보인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전환기의 비엔나 미술을 대표했던 두 거장 구스타프 클림트(Gustav Klimt, 1862~1918)와 에곤 실레. 스승과 제자였던 둘은 1900년 비엔나 예술의 알파와 오메가였고, 그 전부였다. 전시를 여는 작품으로 더할 나위가 없다.
전시의 하이라이트라 할 에곤 실레의 대표작은 이번 전시의 포스터를 장식한 에곤 실레의 자화상 가운데 하나인 <꽈리 열매가 있는 자화상>(1912)이다. 실레의 자화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의 하나로 스물둘 꽃다운 나이에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실레의 개성을 잘 보여주는 멋진 작품이다. 고개를 왼쪽 위로 살짝 치켜들고 관람자를 쳐다보는 실레의 눈빛에서 이 젊고 야심만만했던 화가의 충만한 자신감을 읽을 수 있다.
어깨를 살짝 추어올린 자세며 도도하기 이를 데 없는 입 모양까지 미술사에서 가장 개성적인 자화상을 쏟아낸 에곤 실레 그림의 특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전시장에서 몇 번이고 이 그림을 다시, 또다시 찾아가 그림 속 화가와 눈을 맞춘다. 그러다 보면 마치 저 다문 입술을 열어 꼭 이런 말을 툭 내뱉을 것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흰 바탕에 꽈리 열매를 커다랗게 그려 넣은 것도 이채로운데, 장식성이 강한 클림트의 작업에서 받은 영향으로 보인다. 바탕도 그렇고 검정 재킷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붓이 지나간 흔적이 어지러울 정도로 묘한 무늬를 이루고 있다. 이런 세세한 부분까지 빠짐없이 관찰하려면 모름지기 원화를 봐야 하는 법. 가로세로 모두 40cm가 채 안 되는 작은 그림이 주는 울림이 크다. 그게 바로 에곤 실레 그림의 힘이 아닐까.
이 전시에서 내 마음을 사로잡은 단 한 점을 고르라면 주저 없이 <골고다 언덕>을 꼽고 싶다. 박물관의 작품 해설을 인용하면, 실레는 1911년 8월 오스트리아의 노일뱅바흐(Neulengbach)로 이주했다. 실레의 동료 예술가이자 훗날 실레의 여동생과 결혼한 안톤 페슈카는 노일렝바흐 근교의 부흐베르크 산에서 내려다본 들판 풍경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말했단다.
화면을 절반 이상 차지하는 흙빛 언덕 저편 위에 작은 십자가 세 개가 보인다. 그리고 거기 매달린 사람의 형상은 십자가와 구분되지 않을 만큼 작고 희미하다. 그림 밖에 서 있는 나와 십자가의 거리는 좀처럼 가늠되지 않는다. 그 어떤 질감도 느낄 수 없도록 색을 섞어 번지듯 그린 들판이 십자가와 나 사이를 완고하게 나누고 있다. 마치 구원이란 것이 손에 잡히지 않을 만큼 저 아득히 먼 곳에 있다는 듯 말이다.
얼마 전 포스팅한 글 <소설가들이 사랑한 화가 ‘에곤 실레’>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에곤 실레의 그림에 관한 호불호와 상관없이 대부분이 동의하는 한 가지가 바로 데생가로서 타고난 재능이다. 에곤 실레는 지우개를 쓰는 법이 없었고, 늘 실물을 놓고 그렸다고 한다. 드로잉할 때는 대체로 윤곽선만 그렸고, 색을 입힐 때는 모델 없이 기억에 의존해 그렸다. 대체로 원근법을 무시했고, 때론 사다리에 올라가 모델을 내려다보며 그렸다. 부감법을 사용한 인물화가 적지 않은 이유다. 그는 실로 아무런 금기도 없는 예술가였다. 그러면서 자기 예술을 향한 무한한 자부심을 지녔다.
“예술가들은 영원히 살 것입니다. 나는 항상 가장 뛰어난 화가들은 인간의 형상을 그렸다고 확신합니다. ……나는 인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을 그렸습니다. 에로틱한 작품들은 그 자체로 성스럽기도 하지요! ……한 장의 ‘살아 있는’ 예술 작품 하나로 예술가는 영원히 살 수 있습니다. 내 그림들은 사원 같은 건물에 걸려야 합니다.”
특히 풍경에 관한 에곤 실레의 말은 음미할 만하다.
“제 생각에 자연을 그대로 베끼는 데생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 보입니다. 저는 기억을 더듬어서 작업합니다. 내 작품들은 풍경에 대한 나의 관점을 보여줍니다. 현재 나는 산과 물, 나무들과 다른 식물들의 실제적인 움직임을 관찰하고 있습니다. 어디에서나 인간 몸의 움직임에 대해 기억합니다. 절제하기 어려운 기쁨이나 고통의 충동이 식물들에게서도 느껴진다는 말씀입니다. 데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색을 입힘으로써 새로운 이점들이 생겨납니다. 한여름의 나무 앞에서 가을 나무를 느끼기 위해서는 마음 깊숙한 곳에 자리한 영혼의 울림을 들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우수의 느낌을 그리고 싶습니다.”
영화로, 책으로 만난 에곤 실레의 작품을 직접 만나는 즐거움을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세계 최대의 에곤 실레 컬렉션을 보유한 오스트리아 레오폴트미술관이 소장한 회화, 드로잉, 포스터, 사진, 조각, 공예, 가구 등 무려 191점을 선보이는 이번 전시를 위해 레오폴트미술관의 한스 페터 비플링어 관장을 비롯한 관계자 5명이 미리 한국에 와 전시장 디자인과 작품 설치에 상당한 공을 들였다고 한다. 그만큼 전시품의 수준도 높고, 작품 관람 환경도 훌륭하다.
찌든 일상에 흐려진 안구를 정화하고 싶다면 국립중앙박물관에 가서 에곤 실레의 원화를 만나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