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31) 하인두 작고 35주년 기념전 <혼불, 빛의 회오리>
1989년 4월 25일 오후 5시 서울 인사동 선화랑. 초췌한 모습의 하인두 화백과 부인 류민자 화백이 전시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 앞에 서자 강원용 목사가 기도를 시작했다. 화가의 쾌유와 더불어 하나님의 은총으로 그의 예술이 빛나게 해달라고 간구했다. 소설가 정연희 씨도 하 화백이 좋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병마와 싸워 이길 힘과 용기를 주십사고 울먹이며 간절히 기도했다. 당시 현장을 직접 취재한 미술기자 이규일은 훗날 자신의 책 <한국미술의 명암>(시공사, 1997)에 그날의 감흥을 이렇게 적었다.
“장내가 숙연하다. 20여 년 동안 전시장이란 전시장은 거의 빼놓지 않고 찾아다닌 필자도 1989년 4월 하인두 화백의 전시회와 같은 감격스런 장면은 처음 보았다. 크리스천이 아닌데도 기도로 문을 여는 전시회 개막식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경건한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불교에 젖어온 하 화백 내외도 아무렇지 않은 것 같았다. 그렇게도 불심이 깊은 이들 부부에게 개종의 바람이 불었단 말인가……. 하 화백은 불교 의식이면 어떻고, 기독교 의식이면 어떠냐고 아랑곳하지 않았다. 종교의 차원을 뛰어넘은 해탈의 경지일까……. 다과회가 계속되는 동안 하 화백은 가끔씩 몰려오는 통증을 어금니를 물고 꾹 참는다. 괴로운 모습이다. 하지만 버티고 서 있다. 암. 누가 만든 말인가. 의사도 가족도 입에 올리기조차 꺼리는 이 병과 하 화백은 싸우고 있었다.”
생의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개인전을 앞두고 하인두는 초조했다. 견디기 힘든 신체적 고통 때문에 캔버스 앞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들었다. 하지만 그려야 했다. 아내는 힘들어하는 남편을 다독이며 화실로 이끌었다. 하루 30분씩이라도 캔버스 앞에 서 보라고 권했다. 붓을 든 첫날에는 10여 분 동안 화폭에 황칠을 한 게 전부였다. 현기증이 나서 쓰러질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하인두는 쓰러지지 않고 끝내 버텼다. 그때부터 작업량이 나날이 늘었다. 화실에 새 작품이 차곡차곡 쌓였다. 곁에서 이 모습을 지켜본 아내 류민자 화백의 회고다.
“‘붓을 든 채 쓰러지면 순직이 되는 게 아닌가.’ 하고 자못 비장기 있는 익살도 떨곤 하는 그는 남의 1년 치를 하루에 해치우듯 짧은 시간이지만 신들린 사람처럼 작품을 해낸다. 다행히 그 순간만은 자기의 고통을 잊는 듯하다. 나는 그의 그림을 지켜보면서 같은 화가의 입장에서 요즘처럼 부러움을 느낀 적이 없다. 사람이란 죽음마저도 아랑곳없는 고뇌의 늪에서 헤치고 나와야 비로소 짙고 영롱한 그 무엇을 탄생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새삼 되씹게 해준다. 그이는 40년 못다한 그림에의 정열을 이제부터 서서히 불태워 나간다고 장담하며 ‘이제부터가 시작’이라며 마냥 어린아이처럼 설렌다.”
그렇게 병마와 싸우며 완성한 작품들이 선화랑 전시장에 걸렸다. 하인두의 개인전이 4월 25일부터 5월 11일까지 열렸다. 화가 생전의 마지막 개인전이었다. 1989년 10월 1일 수필집 <혼불 그 빛의 회오리>가 출간됐다. 그리고 그해 11월 12일 하인두는 서울 위생병원에서 눈을 감았다. <한국미술의 명암>에 실린 하인두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이규일 선생이 현장에서 느꼈을 그 먹먹한 감동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화가가 떠나도 예술은 남는다.
한 남자를 본다. 윗도리를 벗어 던지고 한 손에는 팔레트를 꼭 쥐었다. 캔버스에 가린 다른 손에는 틀림없이 붓이 들렸을 것이다. 몹시 더운 날이었는지 목에 흰 수건을 두르고 머리에는 챙이 넓은 밀짚모자를 썼다. 커다란 두 눈, 굳게 다문 입술. 커다란 거울에 비친 자기 모습을 그리는 스물네 살 청년 하인두. 이규일의 책에 수록된 도판을 본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 어느새 나는 전시장에 걸린 하인두의 자화상 앞에 서 있다.
작고 35주기를 맞아 하인두의 예술 세계를 재조명하는 전시 <혼불, 빛의 회오리>가 12월 10일(화)부터 19일(목)까지 딱 열흘 동안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린다. 출품작 40여 점이 대부분 그동안 대중에게 선보인 적 없는 미공개작이라 하인두의 예술 세계를 조금 더 가깝게 들여다볼 좋은 기회다. 일찍부터 한국적 앵포르멜과 추상 표현주의 화풍을 개척한 하인두는 1980년대에 피안(彼岸), 밀문(密門), 묘환(妙環), 만다라(曼茶羅), 역동의 빛, 생의 환희, 태양의 상 등 다양한 연작을 쏟아내며 자기 예술의 지평을 확장했다. 그런 끊임없는 실험과 모색을 거쳐 하인두 예술을 정점으로 올려놓았다고 평가되는 연작이 바로 ‘혼불-빛의 회오리’다.
가톨릭 성당을 화려하게 장식한 스테인드글라스를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하는 하인두의 작품을 보면서 나는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하인두 그림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다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기독교의 도상이 꽤 많이 보인다는 것. <한국미술의 명암>에 인용된 미술평론가 오광수의 글에도 그 점을 지적한 대목이 나온다.
“현란한 색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빛의 감동적인 여울을 고스란히 그의 화면에 오버랩시켜본다. 그리고 빛은 구원과 계시의 추상적 세계의 가장 감동적인 재현이라고 서슴없이 말하고 싶다. 이상하게도 <만다라의 상>, <광휘의 상>, <해돋이 만다라>가 기독교적인 구원의 관념과 깊게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 빛의 독특한 구조와 불가분한 관계 위에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확실히 그의 후기 작품에 나타나는 빛의 관념은 불교적인 것이기보다는 기독교적인 계시의 그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인두의 그림에서 나는 가시면류관을 쓴 예수 그리스도, 성모자, 날개를 활짝 펼친 천사의 모습을 본다. 1970년대부터 이미 하인두는 동서양의 종교를 자기만의 예술 세계에 난만하게 녹여냈다. 하인두에게 예술이라는 것은 빛이요 구원이요 변하지 않는 영원성을 향한 갈망이자 희구가 아니었을까. 하인두는 생전에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우리의 시각이 티 없이 맑으면 그림에서 분명히 한 사람의 생의 외경(畏敬), 그 환희의 고동이 들릴 것이다. 진실하게 살아온 한 사람의 울림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언제나 어디서나 그 울림을 멈추지 않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