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33) <금추 이남호 화집>(동아일보사, 1979)
한국 근현대 미술사에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생애와 업적을 가장 진지하게, 가장 많이 그린 화가로 이름을 남긴 금추 이남호(錦秋 李南浩, 1908~2001). 산수, 인물, 화조, 도석, 기명절지 등 다양한 화목을 아우른 그림 솜씨는 물론이거니와 글씨에도 일가견이 있었던 이남호 화백의 장기는 단연 역사인물화였다.
고려 공민왕 때 원나라에 갔다가 목화씨를 들여온 문익점의 업적을 열두 점으로 그린 <목화씨 전래도>, 성춘향의 일대기를 묘사한 열 폭짜리 병풍 <춘향전일편>, 그리고 2023년 10월 칸옥션 경매에 출품된 열 폭 병풍 <충무공평생도십곡병> 등이 있다.
■병풍 그림에 담은 이순신의 ‘결정적 장면’ (KBS 뉴스 2023.10.20.)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97912
그중에서도 이남호 화백 일생일대의 역작이자 대표작으로 꼽는 것이 바로 1973년에 완성한 <충무공일생기 忠武公一生記>. 세로 165cm, 가로 58cm 화폭 열두 폭으로 이뤄진 병풍 그림이다. 2023년 칸옥션 출품작 <충무공평생도십곡병>과 비교하면 각 폭의 크기는 물론 그림 내용까지 거의 똑같다고 봐도 될 만큼 비슷하다. 다만 두 폭을 늘리면서 이순신 장군이 거북선 건조를 감독하는 장면이 추가됐고, 결정적으로 병풍의 시작점인 제1폭을 이순신 장군의 초상으로 장식했다.
심전 안중식, 이당 김은호, 월전 장우성, 청전 이상범, 정재 최우석, 풍곡 성재휴까지 한 시대를 풍미했던 뛰어난 화가들이 이순신의 초상과 영정을 남겼다. 하지만 금추 이남호가 이순신 초상을 그렸다는 사실은 뜻밖에도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병풍으로 묶여 독립적인 작품으로 인식되지 못한 탓이겠으나, 병풍에서 따로 떼어내도 개별 초상화로 전혀 손색이 없다.
다만 1970년대 초반만 해도 조선 중기 복식에 대한 고증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이순신 장군이 중국 갑옷을 입은 모습이다. 광화문 이순신 동상이 그렇다. 흥미로운 사실 하나 더. 이순신 장군이 갑옷 입은 모습을 그린 초상이나 영정이 뜻밖에도 없다는 점.
이 그림은 동아일보사가 1979년에 발간한 <금추 이남호 화집>에 실려 있다. 이 화집은 1979년 11월 6일부터 17일까지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금추 이남호 회고전>에 맞춰 펴낸 것이다. 이순신 관련 그림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화가의 대표작 <충무공일생기 忠武公一生記>의 도판을 확보할 목적으로 화집을 손에 넣었다. 도판으로 실린 작품은 모두 193점인데, 앞의 절반과 달리 뒷부분 도판이 흑백인 것이 아쉽다. 도판 뒤에 인보(印譜)가 붙었고, 제자 김종국 화백의 글 <내가 아는 금추선생>, 당시 국립중앙도서관 고서위원으로 있던 박진주 씨의 평론 <금추준을 이룩한 인물풍속화의 고찰>이 실렸다. 이 가운데 <충무공일생기>에 관한 대목을 옮긴다.
“수작 중의 수작은 역시 풍무공 이순신 장군의 일대를 기록한 십이곡병풍이라 하겠는데 충무공이 소년시절의 군사놀이 광경으로부터 우리 역사상 잊을 수 없는 임진왜란 칠년간에 걸친 처참한 난중 수군이었기에 바다에서 이 전란을 승리로 이끌어 장렬히 사라진 성웅은 전화 속에 고립된 나라와 겨레를 구출하였고 그 숭고한 충무공의 애국애족정신은 금일에 한국정신의 기둥이 되어 작품화한 대작을 들 것이며…”
그 뒤에 실린 연보를 추려 보면, 이남호 화백은 8살 때 한학자 김우명 선생에게 한문과 서법을 배웠고 19살 때 상경해 양정고보에 들어가 공부하며 당대의 저명한 서가(書家) 석정 안종원 선생에게 서법을 배웠다. 21살에 양정고보에서 중앙고보로 옮겼다가 심장질환으로 중퇴하고 대구의 병원에서 치료를 받았다.
23살에 중국 베이징대학에 유학 가 있던 고향 친구의 안내로 베이징에 따라가 북평대학 중국화과에 입학, 처음으로 정식 미술교육을 받으며 화가가 되겠다는 뜻을 굳힌다. 24살 때 심장질환이 재발해 유학을 중단하고 귀국, 명산명찰을 주유하며 신병 치료와 풍류 생활을 했다. 이때부터 각지를 돌며 전시회를 연다. 29살 때 당대의 명인 호석 임석윤에게 거문고를 배웠다. 35살에 다시 상경해 이당 김은호에게 그림을 배웠고, 이 인연으로 이당 제자들의 모임 후소회에 들어간다.
여기까지만 봐도 화가의 이력이 남다르다는 걸 알 수 있다. 이남호는 일찍부터 한학과 글씨를, 중국 대학과 이당 김은호 문하에서 그림을 배워 서화(書畫)에 두루 능했다. 게다가 당대의 명인으로부터 배운 거문고 솜씨 또한 일품이었을 만큼 음악에도 조예가 깊어 남도에서 한가락 한다는 사람 치고 금추 이남호를 모르는 이가 없었을 정도였다고. 진정 풍류를 아는 화가였던 것. 앞서 소개한 박진주 씨의 평론에 기가 막힌 구절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