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35)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 × <클림트>
헐렁한 가운을 걸친 대머리 아저씨가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자세를 취했다. 작업실을 나와 야외 정원에서 잠시 한낮의 휴식을 즐기는 모습일까. 몸을 앞으로 살짝 기울여 품에 안은 고양이를 보여주려 했을까. 이봐, 얘 어때? 예쁘지? 클림트는 고양이를 사랑했다. 작업실에는 늘 고양이들이 어슬렁거렸다. 클림트의 마흔아홉 살 모습을 사진에 담은 이는 클림의 공식 사진사 모리츠 네어(Moriz Nähr). 클림의 작업실을 드나들며 사진을 찍을 수 있었던 유일한 사진가였다. 클림트 사진은 많다.
또 한 장의 기념비적인 사진을 본다. 빈 분리파라 불리는 새로운 예술가 모임의 단체 사진. 1902년 제14회 빈 분리파 전시회 개막을 앞두고 전시장에 모인 이들이 카메라 앞에서 자세를 취했다. 새로운 예술에 관한 열정으로 충만했던 이들의 면면이 야심만만 그 자체다. 왼쪽에서 두 번째, 왕좌에 앉은 모습으로 정면을 바라보는 이가 바로 클림트다. 이 사진 또한 클림의 공식 사진사 모리츠 네어가 찍었다. 클림트는 그들을 이끄는 ‘장군’이었다.
클림트는 자화상을 그리지 않았다. 19세기에서 20세기로 넘어가는 세기 전환기의 비엔나 예술을 대표하는 또 한 명의 화가 에곤 실레가 100점이 넘는 자화상을 남긴 것과는 대조적이다. 클림트에 필적하는 명성을 지닌 화가 가운데 클림트만큼 자화상을 안 그린 화가가 또 있을까. 왜 클림트는 자기 얼굴을 그리지 않았을까. 스물여덟에 요절한 에곤 실레도 100점 넘게 그린 자화상을 그보다 훨씬 오래 살며 그림을 그린 클림트는 왜 안 그렸을까.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을 취재하다가 그게 가장 궁금해졌다.
그래서 오랜 기간 내 책장에 꽂혀 있던 책 <클림트>(아르테, 2018)를 펼쳐 들었다. 본격적인 자화상이라 부를 만한 독립적인 그림은 역시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클림트가 딱 한 번, 자기 얼굴을 그려 넣은 사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886년 클림트는 비엔나에 새로 지어진 극장 건물의 두 군데 입구, 즉 황제의 입구와 대공의 입구 계단 천장화를 그려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당시 클림트의 나이 스물넷이었다. 클림트는 황제 입구 천장에 <로미오와 줄리엣> 공연 장면을 그렸다.
연습용 스케치가 남아 있어 클림트가 그린 것이 확실한 이 그림에서 화면 오른쪽에 앉은 사람들 가운데 노란 원 안의 인물이 바로 클림트다. 이 그림이 클림트가 자기 얼굴을 그린 유일한 사례다. 옆의 두 사람도 클림트와 함께 천장화를 그린 동료다. <클림트>의 저자는 이렇게 설명한다.
“부르크 극장 천장화에 자신과 동료들을 등장시킨 것은 당시 워낙 모델이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정확한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 클림트는 자신의 친구와 동료들, 가족들에게 엘리자베스 시대의 의상을 입혀 포즈를 취하게 한 뒤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서 천장화에 그려 넣었다. 그 와중에 모델이 부족하자 자신의 모습까지 동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황제의 극장에 그리는 천장화인 만큼 무엇보다 ‘정확도’가 가장 중요한 부분이었다.”
모델이 없어서 대신 자기 얼굴을 그렸다. 이 지극히 현실적인 이유가 오늘날 클림트의 유일한 자화상으로 남았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클림트는 자화상은 물론 일기나 인터뷰 같은 기록도 거의 남기지 않았다.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 거부감이 있었던 걸까. 책을 넘기다 보니 작은 그림 하나가 나온다. 머리는 소, 몸은 엉덩이로 묘사한 수탉의 모습. 그런데도 얼굴을 보면 영락없는 클림트 자신의 모습이다. 독립적인 클림트의 자화상이라 할 만한 건 이게 전부다.
석기자미술관 제127화에서 언급했듯이 국립중앙박물관 특별전 <비엔나 1900, 꿈꾸는 예술가들>의 주인공은 의심할 바 없이 에곤 실레다.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의 레오폴트미술관의 자랑이 바로 에곤 실레이기 때문. 그렇다면 클림트를 보기 위해 딱 한 군데를 고르라면 어디로 가야 할까. 바로 벨베데레미술관이다. 지금으로부터 20여 년 전, 언론인 연수 프로그램에 초청돼 유럽 각국을 방문할 기회를 얻어 비엔나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 바쁜 일정을 쪼개 우리가 찾아간 곳이 바로 벨베데레미술관이었다. 거기서 나는 저 유명한 클림트의 <키스>를 두 눈으로 직접 봤다. 하지만 그때는 미술을 모르던 시절. 지금 다시 가서 본다면 그림을 대하는 자세부터 달랐으리라. 언제 다시 가볼 수 있으려나.
이번 전시에 클림트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작품은 없다. 하지만 그 덕분에 왜 클림트가 자화상을 안 그렸을까 궁금해하며 잠시 다른 궁리를 해볼 수 있었다. 누구나 내가 타고난 것, 내가 배운 것,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으로 산다. 금세공업자의 아들로 태어나 황실이 세운 장식공예학교에서 배운 클림트에게 ‘장식미술’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 것이다. 저 멀리 6세기 비잔티움 모자이크에서 자기 예술의 길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하늘에서 툭 떨어진 것 같은, 당시에 유행하던 어떤 유파나 사조에도 없는 자기만의 독창적인 양식을 이룩할 수 있었던 클림트는 세기말의 비엔나가 낳은 천재적 화가였다.
비엔나에서 태어나 비엔나에서 죽은 비엔나 토박이였던 클림트가 살면서 유일하게 자주 찾아간 곳이 있다. 아터제(Attersee), 쉬운 말로 아터 호수다. 오스트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이 호수는 최대 길이 18.9km, 최대 너비 3.3km에 이른다. 갑갑한 도시 생활에 지친 클림트에게 그곳은 구원의 장소였을 것이다. 클림트는 해마다 여름이면 아터 호수에 가 머물곤 했다. 그런데 그냥 쉬기만 한 게 아니라 거기서 풍경화를 그렸다.
이터 호숫가의 작은 마을에 있는 예배당 풍경을 담은 클림트의 <큰 포플러 나무 II (다가오는 폭풍)>에서 단연 시선을 잡아끄는 건 화면 오른쪽 절반을 차지한 커다란 포플러나무다. 클림트는 자기가 해오던 대로 포플러나무 잎을 다양한 색으로 점 찍듯 그렸다. 그래서 클림트 시대의 어느 평론가는 이 그림의 표현을 보고는 ‘송어의 비늘’ 같다고 했다지 않은가. 짙은 구름이 어지럽게 엉킨 하늘은 다가오는 거대한 폭풍을 예감하게 한다. 캔버스의 가로, 세로 길이가 정확하게 일치하는 정사각형의 풍경화라 더 이채롭다.
누구에게든 숨 쉴 공간은 필요한 법이고, 클림트에게 그곳은 아터 호수였을 것이다. 막다른 길에 몰리면 환경을 바꾸라고 했다. 그래서 빈센트 반 고흐는 파리를 떠나 아를로 갔고, 모네는 지베르니로, 세잔은 생트 빅투아르산으로, 호크니는 요크셔로 갔다. 고금동서를 막론하고 환경의 변화는 예술가의 운명을 바꿨다. 아터 호수에서 클림트는 그리고 싶은 욕구를 억누를 수 없었을 것이다. 클림트는 그곳에서 안식을 얻었다. 책에서 더없이 사랑스러운 가족의 한때를 보여주는 사진을 만났다. 클림트 평생의 연인이었던 에밀리의 오빠의 딸과 클림트가 함께 찍은 모습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