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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이 마음을 움직인다면…그건 색 때문이겠지요."

석기자미술관(182) 이정명 《바람의 화원》(밀리언하우스, 2007)

by 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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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설을 처음 읽은 게 2015년 8월이다. 10년 전, 내가 책 뒤 속지에 그렇게 적었다. 소설을 읽기로 한 건 간송미술관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전시회를 보려고 기다리는 이들의 행렬이 족히 수백 미터에 이르렀는데, 일찍이 본 적 없는 구름 인파가 미술관으로 몰려들게 한 계기는 드라마였다. 이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바람의 화원》이다.


처음 읽었을 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동생 윤복에게 줄, 세상에 둘도 없는 붉은색을 만들기 위해 형 영복이 칼로 자기 손바닥을 그어 피를 받는 대목이었다. 영복은 물었다. “여인의 얼굴에 어린 홍조를 표현할 붉은색이란 어떤 것일까?” 백방으로 온갖 시도를 다 해봤지만, 원하는 색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영복은 가장 원초적이고 단순한 방법으로 돌아간다. 피를 받는 것. 칼이 지나간 자리에서 배어 나오는 발간 선혈을 보면서 영복은 비로소 만족한다. “이 색이다. 순수한 피가 머금은 순수한 붉은색…….”


10년 만에 소설을 다시 펼쳐 들게 만든 건 얼마 전에 읽은 서경식의 《나의 조선미술 순례》(반비, 2014)였다. 이 책의 한 장인 <성별조차 초월한 이단아 / 신윤복>에 《바람의 화원》의 작가 이정명의 인터뷰가 제법 길게 실렸다. 소설이 나오고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엄청난 논쟁을 몰고 온 사실을 다시 설명할 필요는 없으리라.


요는 작가가 신윤복을 남자가 아닌 여자로 설정한 것인데, 처음 읽을 때부터 내게는 그런 설정이 더 소설답게 느껴졌다. 이야기는 이야기일 뿐. 서경식의 책에서 읽은 이정명 작가의 인터뷰 내용도 충분히 수긍할 만한 것이었다. 단언컨대 우리나라에서 화가와 그림을 소재로 한 이야기 가운데 《바람의 화원》보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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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로 읽으면서 가장 깊이 와 닿은 대목은 혜원의 그림 <월하정인 月下情人>을 놓고 단원과 혜원 두 사람이 나누는 대화다.


“이 그림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면…… 그것은 색 때문이겠지요.”

“색이 이토록 시리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단 말이냐?”

“색이 난잡하다는 것이 곧 색이 사람이 마음을 움직인다는 증거입니다. 색이 사람의 마음을 기쁘게 하고 슬프게 하고 애통하게 하고 스산하게 하지 않는다면, 평상심과 중용의 도를 하늘같이 떠받드는 선비들이 그토록 극렬하게 색의 사용을 금할 이유가 없겠지요.”

“색이란 그저 사물이 발현하는 고유한 빛깔일 뿐인데 그것이 사람의 마음을 흔든다는 것인가? 그렇다면 이 그림의 색조가 사람의 마음을 스산하게 한다는 것이냐?”

“그렇습니다. 어떤 색이든 스스로 지닌 성질이 있습니다. 저는 색이 가진 고유의 심상을 끌어내어 그림에 썼을 뿐입니다. 이 그림에서 스산함과 슬픔이 느껴진다면 그림에 쓴 색의 배합이 맞아떨어졌다는 말이겠지요.”


소설을 처음 읽은 그해 겨울, 인사동에서 처음 만난 화가의 그림에서 본 푸른색을 잊을 수가 없다. 소설을 꼭 10년 만에 다시 읽었듯이, 화가를 만난 지도 꼭 10년이 됐다. 그사이에 화가와 나는 둘도 없는 벗이자 예술적 도반이 됐다. 소설 속에서 혜원이 말한 ‘색의 힘’을 현실에서 일깨워준 화가의 이름은 조풍류. 그의 색은 깊고도 진하다. 보면 볼수록 빠져든다. 그 색은 아무도 흉내 내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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