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83)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
1970년 4월 4일 오전 10시,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에 ‘현대화랑’이란 이름으로 첫발을 내디딘 갤러리현대가 올해로 개관 55주년을 맞았다. 설립자 박명자 회장은 화가 이대원이 운영하던 반도화랑에서 1960년부터 8년간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인사동에 화랑을 차려 한국미술을 대표하는 숱한 화가들의 작품을 국내외에 소개하며 한국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 됐다. 지금은 박 회장의 아들 도형태 부회장이 이끌고 있다.
내가 갤러리현대와 처음 인연을 맺은 것이 2010년 5월이다. 갤러리현대에서 열린 <박수근 45주기 기념전 ‘국민화가 박수근’>을 취재하고 뉴스를 만들어 KBS 9시 뉴스 전파를 탔다. 당시 박수근의 아들 박성남 씨를 인터뷰한 기억도 난다. 가장 최근에 만든 뉴스는 2023년 8월 26일 KBS 9시 뉴스에 소개한 <성능경의 망친 예술 행각>이었다. 기자간담회 날 성능경 작가의 능청스러운 퍼포먼스를 현장에서 목격하는 안복을 누렸다. 비슷한 시기에 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인전을 연 김구림 작가와 묶어서 뉴스에 소개했다. 두 작가를 모두 인터뷰한 것도 크나큰 행운이었다.
■‘국민 화가’ 故 박수근 대표작 한 자리에 (KBS 뉴스9 2010.5.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2092454
■실험정신은 죽지 않는다…백발 거장들의 화려한 외출 (KBS 뉴스9 2023.8.26.)
https://news.kbs.co.kr/news/pc/view/view.do?ncd=7758136
반세기를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갤러리현대가 55주년을 기념하는 전시 《55주년: 한국 현대미술의 서사》를 1부와 2부로 나눠 연다. 본관, 신관 전체를 활용한 보기 드문 규모다.
먼저 1부는 본관에서 한국 1세대 모더니스트라 할 수 있는 도상봉, 박수근, 이중섭 등 사실주의 양식의 구상 회화 작가들과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구상전 등 단체에서 활발하게 활동한 반추상 양식의 김환기, 장욱진, 이대원, 최영림 등 1941년 이전 출생 ‘현대적 구상 회화’ 작가 24명의 작품 50여 점을 선보인다. 도상봉 박생광 오지호 김환기 윤중식 박수근 이중섭 최영림 박고석 장욱진 황염수 김흥수 박래현 이대원 임직순 권옥연 천경자 문학진 변종하 김상유 김형근 김종학 류병엽 황영성의 작품을 볼 수 있다.
신관에서는 2세대 화랑주인 도형태 부회장이 본격적으로 갤러리 프로그램에 관하며 시작된 ‘한국 실험미술 작가 다시 보기’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작가들과 도 부회장이 뉴욕대학교 재학 시절부터 파리 유학 시기에 인연을 맺은 디아스포라 작가 12명의 대표작 180여 점을 소개한다. 곽인식 백남준 이승택 곽덕준 김차섭 임충섭 박현기 이건용 이강소 성능경 신성희 김명희 작품을 선보인다.
뚜렷한 주제를 정해 기획한 전시가 아니라 갤러리현대가 55년 동안 만나온 작가들의 작품을 광범위하게 소개하는 자리라 아무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전시다. 다만, 신관에 걸린 작품들은 내용과 전후 맥락을 알아야 제대로 감상할 수 있으므로, 관람객들에게는 익숙한 화가들의 구상 작품을 위주로 한 본관 전시가 더 친근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겠다.
이번 전시에서 가장 내 눈에 띈 작품은 도상봉 화백의 1973년 작 <삼청공원>이다. 세로 24cm, 가로 33.5cm의 아담한 그림으로, 이번 전시에서 처음 봤다. 삼청공원을 소재로 한 그림을 지금껏 본 적이 없어 자연 관심이 갔다. 도상봉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편안함을 준다. 안정적인 구도에 차분한 색감. 옆에 걸린 <라일락>을 봐도 그렇다. 도상봉이란 분은 참 단정하게 그림을 그린 화가였구나, 생각하게 된다.
평생 바닷가 풍경, 특히 항구 풍경을 즐겨 그린 오지호 화백의 1981년 작 <항구> 역시 작지만, 더없이 사랑스러운 그림이다. 얼마 전 전남도립미술관에서 열린 전시 《오지호와 인상주의 : 빛의 약동에서 색채로》에 걸린 어떤 항구 그림보다도 이번에 소개된 작품이 좋다. 희고 검은 구름이 점점이 깔린 하늘 아래 출렁이는 바다는 곧 몰려온 거센 비바람을 암시하는 듯하다.
자신감 넘치는 붓질로 그려낸 하늘과 바다의 푸른색은 ‘오지호 블루’라고 해도 좋을 만큼 개성이 강하다. 오지호의 그림에서만 나타나는 특유의 정서를 ‘남도 기질’로 해석하면 좋겠다고 생각해왔다. 남도에서 태어나 남도에서 자란 이들에게 유전자처럼 각인된 정서가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고 보는 것이다. 숨기려고 해도 숨길 수 없는 기질.
‘장미의 화가’로 유명한 황염수의 1980년대 작품 <팬지>는 아주 특이한 그림이다. 팬지 특유의 무늬에서 화가가 발견한 건 사람의 얼굴. 여섯 사람이 모여 단체 사진을 찍은 것처럼 꽃 여섯 송이의 표정이 제각각이어서 무척 흥미롭다. 꽃을 오래 관찰한 화가의 눈에는 꽃 한 송이 한 송이가 죄다 다르게 보였겠구나 싶다. 옆에 걸린 <장미>(1977)를 보니 정말 그렇다.
김환기의 1954년 작 <답교>도 처음 보는 작품이라 눈길이 갔다. 화면 한가운데 걸쳐진 다리를 중심으로 화면 위쪽에 이미지가 집중된 독특한 구도다. 한국적인 정서와 더불어 종교적 영성까지 환기하는 느낌이 있다. 이중섭의 1950년대 작품 <달밤>도 참 좋다.
평소 채색화에 관심이 많아 천경자와 박생광의 작품은 더 자세히 살폈다. 천경자의 그림을 보고 있으면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자기만의 단단한 세계를 구축한 천경자라는 화가의 압도적인 포스가 느껴진다. 그만큼 남다른 개성을 보여주는 박생광의 그림도 물론 돋보이지만, 천경자의 그림엔 말로 설명하기 힘든 귀기(鬼氣) 같은 게 서려 있어 그림을 보다 보면 묘하게 빨려 들어가는 듯한 기분이 든다.
2024년이 천경자 탄생 100주년이 되는 해였건만, 화가의 위상과 업적에 어울리는 회고전 하나 열리지 않았다는 사실은 다시 생각해도 납득이 안 된다. 심히 유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