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기자미술관(186) 《그림이라는 별세계: 이건희컬렉션과 함께》
여기저기서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한국 근현대 미술품을 전면에 내세운 전시를 동시다발로 열고 있다. 일찍이 이런 적이 있었는가 싶다. 각 전시의 면면은 이 자리를 통해 차근차근 알려드리기로 하고, 가장 먼저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리는 《그림이라는 별세계: 이건희컬렉션과 함께》를 소개한다.
이 전시를 반드시 봐야만 했던 결정적인 이유는 이인성의 1934년 작 <아리랑 고개>였다. 아리랑 고개는 서울 돈암동과 정릉 사이에 있다. 1926년에 제작된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에서 주인공이 일본 순사에게 잡혀가는 장면에 이 일대가 배경으로 나오면서 ‘아리랑 고개’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산머리를 향해 굽이치는 작은 길을 따라 언덕 위로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달동네 풍경을 담았다. 초록과 빨강을 주조로 꽤 정성 들여 색을 입힌 흔적을 볼 수 있다. 도판으로만 보던 그림을 실제로 본 건 처음인데, 구아슈를 사용한 수채화라고는 도저히 믿기 힘들 정도로 단단한 색감이 두드러진다. 유화라고 해도 믿겠다. 일본수채화회전에 출품해 최고상을 받았다고 하니, 이인성이 왜 천재 화가로 불렸는지 알 것 같았다.
<아리랑 고개>는 이인성의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서울 풍경을 보여준다. 이인성이 일본 유학 시절 방학을 맞아 잠시 귀국했을 때 그린 것이라 한다. 일본 유학 시절을 빼면 이인성은 주로 대구를 중심으로 활동한 까닭에 서울에 머문 짧은 기간에 그림을 남겼다는 사실 자체가 특별하다. 이 작품을 포함해 이 전시의 몇 가지 특징을 간단하게 정리해 본다.
1. 국립현대미술관과 지역미술관에 기증된 이건희컬렉션과 리움미술관 소장품 36점이 전시의 중심을 이룬다. 이인성의 <아리랑 고개>(1934)는 리움미술관 소장품이다. 그림 오른쪽 아래 서명이 ‘ㄹㅣㅇㅣㄴㅅㅓㅇ’이라 돼 있다. 성을 ‘리’로 쓴 다른 예가 있는지 모르겠다.
2. 가장 유명한 <경주의 산곡에서>(1934)를 포함해 이인성의 그림이 5점이나 나왔다. 보기 드문, 아니 나로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3. 강요배, 곽인식, 권옥연, 김봉태, 방혜자, 유영국, 이인성, 하인두 등 작가 8명의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을 따로따로 만들고, 그 사이사이를 아치형 출입구로 연결해 놓았다. 얼마 전 호암미술관에서 열린 니콜라스 파티 전시와 같다.
4. 강요배의 그림 8점 가운데 5점이 이건희컬렉션이다. 강요배의 그림은 회화 본연의 맛이 살아 있어서 언제 봐도 참 좋다. 그러니 이건희컬렉션에, 그것도 여러 점이 들어갔으리라. 가장 마음에 드는 그림은 제주의 오름 사이로 떠오르는 해를 달걀 모양으로 그려 넣은 <알>(2005)이었다.
5. 권옥연의 그림도 8점이 걸렸다. 권옥연의 그림 여러 점을 이렇게 한자리에서 본 건 처음이다. 그동안 한두 점씩 드문드문 보아온 까닭에 잘 와닿지 않았던 권옥연 그림의 특색을 볼 수 있어서 매우 유익했다.
6. 유영국의 그림은 9점인데, 그중 몇은 물감의 갈라짐이 심각해 보였다. 심지어 어떤 그림에서는 갈라진 물감의 얇은 층이 마치 껍질 벗겨지듯 벗겨진 모습도 볼 수 있다. 유영국 그림의 상태에 관해 그동안 들은 얘기가 모두 사실이었던 것. 6, 70년대 그림이 그렇다. 하지만 유영국의 색은 역시 독보적이다.
7.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을 오랜만에 찾아 안구를 사정없이 정화했다. 북서울 사람들에게 이 미술관의 존재는 큰 축복이다. 심지어 화·수·목요일은 오후 8시, 금요일은 오후 9시까지 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