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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25. 2020

SF에 관해 말하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

김보영 박상준 심완선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돌베개, 2020)


#1 비디오테이프로 본 <서기 2019년>     


중학교 2~3학년 때였을 겁니다. 어떤 경로로 <서기 2019년>이란 영화의 존재를 알게 됐죠. PC통신 시절 천리안 동호회 ‘멋진 신세계’의 운영자가 제시한 단 하나의 회원 가입 조건이 뭐였는지 아십니까. <서기 2019년>을 본 사람! 박상준이란 이름이 그래서 더 강렬하게 뇌리에 남았는지도 모릅니다. 박상준 씨는 이 책의 저자 중 한 명입니다.     


산 너머 비디오 대여점에서 어렵사리 빌려온 영화는 말 그대로 걸작이라는 명성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보다 더 재미난 사실. <서기 2019년>의 비디오 출시 업체는 영화 중간에 자사 홍보 영상을 삽입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걸작에 대한 예의를 망각한 업자들의 무지가 낳은 폭거로 영화광들 사이에서 두고두고 회자됐죠. 그것도 추억이라면 추억입니다.     



<블레이드 러너>의 원작 소설을 언제, 어떻게 샀는지는 기억나지 않습니다. 1992년에 글사랑이라는 출판사에서 냈으니, 아무리 빨라도 1992년 이후에 책을 사들였겠죠. 당연히 절판된 까닭에 이 판본은 희귀본 중의 희귀본으로 꼽힙니다. 보관 상태도 워낙에 좋아서 제가 드물게 애지중지하는 몇 안 되는 책 가운데 하나죠. 사고 나서 한 번, 2006년에 한 번 읽었습니다. 작품 해설을 쓴 이는 박상준, ‘멋진 신세계’의 바로 그분.     


#2 소설을 쓰던 고교 친구의 추천 도서     


같은 반에 소설을 쓰는 녀석이 있었습니다. 이 친구와 어떻게 가까워졌는지 뚜렷하게 기억나진 않습니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 낯선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무던 애를 먹고 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짐작만 할 뿐이죠. 이 친구의 독서는 이미 대학을 넘어 대학원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한창 독서에 재미를 붙이던 시절이라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수많은 대화를 책으로 가득 채웠죠. 국어 수업 시간에 몰래 소설을 읽다가 걸려서 몇 번을 혼났던지….     

학년이 올라가면서 반이 나뉜 걸 아쉬워하며 저는 틀림없이 그 친구에게 이런 부탁을 했을 겁니다. 좋은 책 좀 추천해줘! 지금은 똑같은 질문을 받으면 질겁을 하건만 그 친구는 꽤 많은 책의 목록을, 그것도 깨알 같은 글씨로 정성 들여 써서 제게 건네주었습니다. 그 목록을 오랫동안 버리지 않고 간직했죠. 지금은 사라지고 없는 목록 안의 책 몇 권을 아직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윌리엄 깁슨의 <뉴로맨서>.     



#3 필립 K. 딕을 전작하다     


책장에서 수많은 책을 걷어내고 또 걷어내면서도 끝끝내 버리지 않고 고이 모셔둔 책이 몇 권 있습니다. 아서 C. 클라크의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모음사, 1990), 스타니스와프 렘 <솔라리스>(청담사, 1992). <앤드로이드는 전기 양의 꿈을 꾸는가>까지 더해서 이 세 권은 정확하게 1992년에 초판 1쇄가 나왔거나, 다시 찍었습니다. 그래서 상상해 봤죠. 1992년은 한국 SF에 뭔가 중대하고 의미심장한 해가 아니었겠냐고. <솔라리스>에 작품 해설을 실은 이는 박상준, 거듭 등장하는 바로 그분입니다.     


필립 K. 딕은 제가 전작을 읽어보자고 마음먹은 첫 작가였습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책을 사 모으고 읽어왔죠. 다행히 지금은 K. 딕의 거의 모든 작품을 우리말 번역으로 읽을 수 있으니 얼마나 행복한지 모릅니다. 찾는 사람이 있고 읽는 사람이 있다는 뜻이니까요. K. 딕의 소설을 읽게 만든 계기는 당연히 영화 <서기 2019년>이었습니다. 그 뒤로 K. 딕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빼놓지 않고 봤죠. 그가 그린 미래는 허황되지 않아서 섬뜩합니다.     


#4 아주 우연히 만난 김보영 작가     


김보영의 소설은 매혹적입니다. 빠져들지 않고는 못 배기죠. 잡문이나 끼적거리며 사는 처지라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그 재주가 얼마나 부러운지 모릅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아는 사람, 다시 말해 크리에이터들은 서로 알아보는 눈도 있는 모양입니다. 봉준호 감독이 <설국열차>를 구상하면서 크리에이터를 수소문하다가 찾아낸 이가 바로 김보영 작가였다고 하죠. 작가가 던져준 몇 가지 아이디어는 실제로 영화 이곳저곳에 녹아들었습니다. 영화의 엔딩 크레딧에 김보영 작가는 ‘시나리오과학자문’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지난해 여름, 김보영의 소설 세 작품의 판권이 미국 최대 출판그룹 하퍼콜린스에 수출됐다는 반가운 소식을 담은 이메일이 당도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작가길래 SF의 본토이자 왕국인 미국에서 판권을 사 갔을까. 호기심이 발동했습니다. 작가를 조사하고, 책을 사서 읽고, 집으로 찾아가 만났습니다. 저는 김보영 작가를 9시 뉴스에 얼굴이 나온 한국 최초의 SF 작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기꺼이 작가의 팬이 되었죠.     


#5 SF 거장과 걸작의 연대기     


이 책은 <한국일보> 주말판에 장기 연재한 것들을 모으고 다듬고 빼고 덧붙이는 여러 과정을 거쳐서 나왔습니다. 독립적인 각각의 글에 담긴 정보의 양과 가치도 훌륭한 데다, 서로 다른 개성을 지닌 필자들의 글솜씨를 비교해가며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당분간 이 책을 능가하는 SF 백과사전은 나오기 힘들지 않겠나 싶습니다. SF에 관한 추억의 부스러기가 있다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넘기게 되는 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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