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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25. 2020

그림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이종수 《조선회화실록》(생각정원, 2020)


실록과 회화를 나란히 놓고 읽는 조선사. 이 책의 지은이가 서문의 제목으로 삼은 구절입니다. 책을 읽기 전에 독자는 이런 기대를 품게 됩니다. 실록의 기록을 그 시대의 회화와 어떻게 엮어서 균형 있게, 그러면서도 재미있게 들려줄 것인가. 실록에 치우치면 그림 이야기가 빈약해지고, 그림에 무게 중심이 쏠리면 실록의 기록을 억지로 끼워 맞추는 모양새가 될 수 있기 때문이죠.     


결론을 말하면 저자는 두 가지 토끼를 모두 잡는 데 성공한 것처럼 보입니다. 실록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가 적절하게 녹아들어 읽는 재미가 남다릅니다. 틀림없이 저자는 실록은 물론 그림까지 아주 꼼꼼하게 읽었을 겁니다. 내용만 탄탄한 것이 아닙니다. 글발까지 좋습니다. 간만에 빛의 속도로 술술 읽히는 미술책을 만났죠.     


<미원계회도>, 1531년, 비단에 채색, 95×57.5cm, 삼성미술관 리움



정쟁의 피로 얼룩진 허수아비 임금 중종의 시대를 증언하는 그림으로 선택된 <미원계회도 薇垣契會圖>를 주목합니다. 미원은 사간원(司諫院)의 다른 이름. 사간원 관리들의 계 모임을 그린 이 그림의 제목 아래 우뚝 솟은 봉우리가 보입니다. 경복궁 뒤에 있는 백악산(白岳山)입니다. 그림이 그려진 시기는 1531년. 확인을 더 해봐야겠지만, 조선시대 그림 가운데 백악을 묘사한 가장 오래된 그림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2011년 삼성미술관 리움의 특별전 <조선화원대전>에 출품됐는데, 당시 전시회를 취재했음에도 이 그림을 눈여겨본 기억은 없군요. 그러니 책에서 만난 이 그림이 낯설게 보일 수밖에요. 백악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면 이 그림은 어쩌면 영영 제 관심 밖에 남아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파진대적도>, 《충렬록》 중, 1798년(초간 1621년)



패배한 전투도 그림으로 그려 역사에 남겼을까. 실제로 있더군요. 광해군 11년인 1619년 중국 땅에서 벌어진 조명 연합군과 후금의 대결에서 조선군 1만 3,000여 명 가운데 9,000명이 전사하고 나머지는 포로로 잡혔습니다. 2년 뒤 훈련도감은 이 전투를 진두지휘한 김응하의 노고를 기리기 위해 《충렬록 忠烈錄》을 펴냈는데, 이 그림은 책에 삽화로 수록된 그림 넉 점 가운데 하나입니다.     


전투 장면을 그린 조선시대 그림은 손에 꼽을 만큼 적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그림은 비록 삽화로 그려지긴 했어도 조선시대 육군의 진법을 보여주는 귀중한 자료입니다. 《충렬록 忠烈錄》에는 이 밖에도 양수투항도(兩帥投降圖), 원포독전도(援抱督戰圖), 시진검격도(矢盡劒擊圖)가 수록되어 있습니다.     


<수문상친림관역도>, 《어제준천제명첩 御製濬川題名帖》 중, 1760년, 비단에 채색, 34.2×44.0cm



제가 이 책에서 만난 또 하나 재미있는 그림이 있습니다. 조선 영조시대 청계천 일대가 담긴 <수문상친림관역도 水門上親臨觀役圖>입니다. 청계천이 홍수로 범람해 백성들의 피해가 극심해지자 영조는 청계천 바닥의 흙을 긁어내는 준천 사업을 지시하고 친히 행차해서 공사 진행 과정을 살필 만큼 이 사업에 지극한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청계천은 애민(愛民)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입니다.     


영조의 행차를 기념하기 위해 그림 넉 점으로 이뤄진 <준천시사열무도 濬川試射閱武圖>가 제작됩니다. <수문상친림관역도>는 그 가운데 청계천 현장 시찰 그림입니다. 청계천 다리 위 차일 아래 빈 의자가 놓여 있습니다. 초상화를 빼곤 지존의 모습을 그려 넣지 않은 오랜 전통을 따른 겁니다. 준설 현장에 동원된 소는 네 마리입니다. 만만치 않은 공사였던 게지요.      


이 그림은 서울대 한국학규장각연구원과 부산박물관 등 여러 곳에 나뉘어 소장돼 있는데, 각각의 그림을 비교해 보면 거의 똑같으면서도 아주 살짝 다른 점이 보입니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그림은 대단히 중요한 시각 매체였음을 목적성이 뚜렷한 이런 그림들을 통해 확인해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몇 명인지, 짐승은 몇 마리인지, 하나하나 뜯어보고 짚어나가다 보면 옛 그림 읽는 재미가 실로 각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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