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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Feb 27. 2020

손때 묻은 책에서 찾은 시간과 인연의 흔적

이원태 김탁환 《조선 누아르: 범죄의 기원》(민음사,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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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의 어느 밤, 광화문 광장에 섰습니다. 마이크 앞에 서서 미리 준비해간 책의 서문과 작가의 말을 차례차례 읽어 내려갔습니다. 세월호 소설의 출발점으로 여겨지는 김탁환의 《목격자들》을 시작으로  《거짓말이다》, 《아름다운 그이는 사람이어라》, 《그래서 그는 바다로 갔다》에서 뽑아낸 문장들. 몹시도 추운 날이었고, 저는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래서 부끄러움에 관해 말하고자 했습니다. 김탁환 작가의 글 뒤에 숨어서요.     


2

한낱 독자인 제가 작가에게 진 무거운 빚을 갚는 길은 작가의 작품들을 성실하게 읽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전작 읽기를 시작했죠. 김탁환 세월호 소설의 출발점이 장편 《목격자들》이란 사실엔 변함이 없지만, ‘세월호에 관한 생각’의 출발점은 2014년 12월에 나온 바로 이 장편소설 《조선누아르》였습니다. 작가의 말에서 김탁환은 이후에 쓸 이야기의 방향을 분명하게 예고했습니다.     


아침마다 확인하던 사망자 숫자는 단식에 돌입한 이들의 숫자로 바뀌었다. 그리고 완성된 원고 앞에서 단 한 번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 밀려들었다. 국가 권력을 장악한 이 소설의 인물들을 죽이고 싶어졌다. 주인공과의 이별을 따듯하게 아쉬워하던 다른 작품들과는 완전히 다른 기분이었다. 내가 쓰고 만든 살의(殺意)를 쳐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낯설고 아팠다.

인간의 고통 앞에서 중립을 지킬 수는 없다고 했던가. 신음하는 이들에게 곁을 내주며 계속 이야기를 만들어 가겠다. 독자들도 함께했으면 싶다.     


“이 이야기는 어떤 역겨움에서 시작됐다.”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원태 작가의 말도 옮겨놓습니다.


이 글을 쓰는 동안 용서란 단어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세상에 용서받지 못할 일은 없다고 흔히 말한다. 그렇지 않다. 세상엔 용서받지 못할 일도 있고 용서해선 안 될 일도 있다. 기억에 대해서도 또한 생각했다. 세월이 지나면 잊히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말한다. 그렇지 않다. 세상엔 잊혀선 안 될 일도 있고 반드시 남겨야 할 일도 있다. 쉬운 용서는 무책임이고 잦은 망각은 회피다.     


이것으로 소설에 관한 이야기를 갈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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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책을 좋아합니다. 물론 새 책도 좋아하고요. 헌책에 없는 미덕이 새 책에 있고, 새 책에는 없는 매력이 헌책에는 있습니다. 어느 쪽을 편애할 까닭은 없습니다. 헌책을 펼치면 가끔 어떤 이가 써놓은 글귀들을 보게 됩니다. 개인적인 감상과 서명도 있고, 선물하는 이의 마음이 담긴 글씨도 보입니다. 손때 묻은 책에서 찾은 시간과 인연의 흔적들이죠. 새 책에는 없는 매력! 그렇게 보면 책에도 삶이 있습니다. 그러면 이렇게 묻고 싶어집니다. 어떻게 나한테까지 온 거니?     



4

먼저 책을 소유했던 이들의 흔적 가운데는 아주 드물게 작가나 저자가 직접 쓴 글씨도 있습니다. 작가(저자)가 누군가에게 선물한 책. 이런 경우 대개 받는 이의 이름이 적혀 있습니다. 〇〇〇님께. 이 책의 표지를 열자 예의 그 작가 서명이 나왔습니다. 처음 책을 선물 받은 이는 물론 제가 아니었지만, 이름만 가리면 마치 내게 준 선물인 것 같은 기분을 아시는지? 이런 보물을 만나는 행운이야말로 헌책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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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으론 어쩌다 이 선물이 주인의 손을 떠나 시장에 나왔을까 생각해보기도 합니다. 분명히 무슨 사연이 있겠지. 아마 그럴듯한 사연이 있을 거야. 그래도 서명까지 해서 건네준 선물인데 설마 그냥 보냈을까. 그럴 리가. 아니, 오히려 아무 사연이 없는지도 모르지…. 혼자 온갖 추측과 망상에 빠져봅니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이 책을 선물 받은 이는 심지어 소설가입니다. 김 씨 성을 가진 현직 소설가. 물론 이름은 비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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