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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r 16. 2020

조선 왕실 종친 화가 영은군의 까치 그림

이함 <쌍작도>,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35.7×22cm

  


서울옥션 제155회 미술품 경매 도록을 열어봅니다. 페이지를 넘기며 작품을 하나하나 눈여겨보다가 어느 순간 눈을 멈춥니다. 경매번호 122번. 화가는 영은군(靈恩君) 이함(李涵, 1633~?), 그림 제목은 <쌍작도 雙鵲圖>. 까치 한 쌍을 그린 그림입니다. 글씨도, 인장도 없군요. 그런데 어찌 화가를 안단 말인가? 작품의 내력을 담은 기록을 보면 됩니다.     


도록에 소개된 작품 수록처는 유복렬의 《한국회화대관》. 유명한 미술 애호가이자 수집가였던 유복렬 선생이 1969년에 처음 펴낸 이 책은 우리나라 역대 화가들의 면면을 그림과 함께 모아놓은 기념비적 저작입니다. 이름을 올린 화가만 574명. 미술을 향한 지극한 애정과 탄탄한 공부 없이는 절대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과업이 아닙니다.     


자, 그럼 당대의 미술 고수였던 유복렬 선생은 이 작품을 어떻게 평가했을까. 도록에 소개된 것은 아주 간명한 구절입니다. “쌍작도는 조창강의 「작도」와 방불하나, 더욱 유창하다.” 이게 도대체 무슨 뜻인가. 조창강은 17세기 사대부 문인화가 창강 조속(趙涑, 1595~1668). 조선시대에 까치 그림으로 가장 유명했던 화가입니다. 유복렬 선생은 이 그림 <쌍작도>가 창강 조속의 <작도>와 맞먹는 그림이라면서 유창하다, 즉 물 흐르듯 거침이 없다고 평가해 놓았습니다. 그럼 창강 조속의 까치 그림을 한 번 볼까요?     


조속 <고매서작>, 조선 17세기, 종이에 먹, 100.0×55.5cm, 간송미술문화재단


 

창강의 까치 하면 첫손에 꼽는 그림입니다. 제목은 <고매서작 古梅瑞鵲>, 묵은(古) 매화나무(梅) 가지 위에 앉아 있는 상서로운(瑞) 까치란 뜻입니다.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보는 까치. 자못 의연해 보이는 자태가 어느 고고한 선비의 모습을 보는 듯합니다. 까치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가지가 여백을 적절하게 나누며 화면에 균형감과 안정감을 더해줍니다.     


매화와 까치를 함께 그린 까닭은 자명합니다. 매화는 흔히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꽃이죠. 게다가 선비들의 지극한 사랑을 입어 사군자의 하나로 즐겨 그려진 소재이기도 합니다. 까치는 아시다시피 지금이야 천덕꾸러기 신세가 됐지만, 그 옛날엔 기쁜 소식을 가져다주는 상서로운 새(吉鳥)의 대명사였습니다. 둘 다 좋은 일이 생기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으니, 누군가에게 선물로 그려주기 딱 좋은 그림 소재였을 겁니다.     


전(傳) 조속 <메마른 가지 위의 까치>, 조선 17세기, 비단에 먹, 112.4×57.3cm, 국립중앙박물관



물론 이것 말고도 또 있습니다. 이 그림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작품인데요. 아래쪽에 보이는 한 쌍이 때까치, 위에 보이는 것이 까치입니다. 맨 위에 있는 까치는 부리를 문질러 깃털을 고르고, 곁에 있는 까치가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봅니다. 그 아래 때까치 한 쌍은 사랑을 속삭이듯 부리를 벌린 채 서로를 향해 지저귑니다. 다정한 두 쌍의 사랑 노래라고 할까. 봄볕처럼 따뜻하기 이를 데 없는 그림입니다.     



자, 그럼 이제 두 그림을 나란히 놓고 까치의 자세와 가지가 뻗어나간 모양을 자세히 봐주시기 바랍니다. 화가 이름 앞에 전(傳)이 붙어 있으니, 딱 잘라서 화가가 조속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두 그림의 영향 관계를 확인하는 데는 전혀 무리가 없죠. 실제로 영은군은 창강 조속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왕실의 피를 물려받아 태어난 종친들은 벼슬길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출셋길이 막혔으니 뜻을 펴볼 일도 없었죠. 그래도 뭔가는 해야 하지 않았겠습니까. 그 출구가 된 것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림이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영은군은 가야금을 잘 켜고 그림도 잘 그렸다고 합니다. 주로 까치와 매를 소재로 한 화조화(花鳥畵)와 초충도(草蟲圖)를 즐겨 그렸죠. 하지만 영은군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는 게 별로 없습니다. 심지어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찾아보면, 영은군이 부적절한 행동으로 구설에 올랐다는 내용이 보입니다. 현종 7년인 1663년 실록에서 한 신하가 임금에게 이렇게 보고합니다.     


듣건대 영풍군(靈豊君이식(李湜)이 창녀(娼女)에게 고혹(蠱惑)되어 누차 불러도 오지 않자 동생을 보내 데려오도록 하려다가 패려(悖戾)한 행동이 있게 되었다 합니다식은 수죄(首罪)에 해당하니만큼 나문(拿問)하라고 아뢰었어도 안 될 것이 없습니다마는직접 찾아가서 난동을 부린 자는 식의 동생인 영은군(靈恩君이함(李涵)과 영신군(靈愼君이형(李濙)이었습니다신들이 일을 논하면서 실수를 면치 못했으니어떻게 감히 태연히 있겠습니까체차해 주소서.” 하니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형인 영풍군이 노래하는 기생에게 빠져 여러 차례 불러오려 해도 말을 듣지 않자 동생인 영은군을 보냈다, 영은군이 실랑이를 벌이는 과정에서 도리를 저버린 행동을 했다, 이런 사실관계를 똑바로 보고하지 못했으니 책임지고 물러나겠다, 이런 얘깁니다. 임금은 사직하겠다는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모양입니다.     


2년 뒤인 1668년 기록에는 당시 온양에 있는 온천으로 여행을 떠나는 임금의 행렬을 따른 이들의 명단에 영은군의 이름이 보입니다. 4년 뒤인 1692년에도 또 온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번에는 영은군이 직접 온천 여행을 가겠다며 휴가를 달라고 합니다.     


영은군(靈恩君이함(李涵)이 온천(溫泉)에 가려고 청가(請暇)하자특별히 말미를 주고 말도 내어 주도록 명했다가사간원(司諫院)에서 민폐가 있다 하여 도로 정지하기를 청하니그대로 따랐다.     


사간원의 반대로 온천행은 좌절됩니다. 민폐 끼치지 말라! 영은군에 관한 실록의 기록은 이것으로 끝입니다.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조차 기록되지 않았을 정도로 영은군의 존재는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림조차도 남기지 않았다면 철저하게 잊힌 인물로 남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그러니 이렇게 말해도 좋겠습니다. 호랑이는 가죽을 남기고, 화가는 그림을 남긴다!     



다시, 경매에 나온 영은군의 까치 그림을 보기로 합니다. 비전문가인 제가 함부로 그림에 관해 이러쿵저러쿵하는 것은 적절하지 않으니 도록에 실려 있는 작품 해설을 소개하겠습니다. 물론 작품을 경매에 내놓은 쪽의 ‘호의’를 고려해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굽이쳐 꺾인 가지는 활달하면서도 힘있게 묘사했으며가지 위에 앉은 까치 한 쌍은 좀 더 세밀한 필치로 꼼꼼하게 그려냈다날카로우면서도 진한 먹으로 강하게 표현한 부리나 까치의 깃털 표현은 가히 창강 조속의 필치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다.     


    


위에 소개해드린 유복렬 선생의 칭찬을 물려받아 한 번 더 강조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까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화가의 기량 차이가 여지없이 드러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꽁지깃 묘사입니다. 영은군이 그린 꽁지깃은 굵기에 차이가 없는 먹선으로 죽 그어내려 뻣뻣하기 이를 데가 없죠. 반면 <메마른 가지 위의 까치>에 묘사된 까치 꽁지깃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두 그림을 나란히 비교해보면 그런 작지만 큰 차이들이 눈에 보입니다.     


그렇다고 영은군의 그림 솜씨를 폄훼할 이유는 조금도 없습니다. 천재가 아니라면 어느 화가도 당대에 유행한 화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영은군 역시도 자기가 살던 시대의 회화 전통 속에서 널리 유행하던 화풍을 선배 화가들의 그림을 통해 자연스럽게 익혔겠죠. 그렇게 익힌 솜씨로 그림을 그렸고요.     


유명한 미술품 수장가였던 유복렬 선생과 조선 말기에 괴석도(怪石圖)로 이름을 날린 몽인 정학교의 동생 정학수(丁學秀)라는 분이 한때 소장했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 이 그림에 관심을 두는 분들이 적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작품은 3월 13~15일 서울옥션 부산에서, 18~24일 서울옥션 강남센터에서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artlecture.com)에 먼저 게재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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