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쓴 기행문학의 백미② 신유한의 《해유록》
“나는 날마다 시를 써 달라고 조르는 일본인들에게 시달려 우울하고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다.”
조선 숙종 45년인 1719년 제술관(製述官)으로 통신사 행렬에 합류한 신유한(申維翰, 1681~1752)이 일본 아이노시마(藍島)에서 쓴 기록입니다. 지금처럼 여행이 자유롭지 않았던 시절이니 이 조선 문인에게 일본행은 평생에 다시없는 기회였을 터. 지금으로 치면 외교부에 해당하는 승문원(承文院)에서 외교 문서 작성을 담당하던 벼슬인 제술관은 일본 통신사 사절단에서 ‘글 담당’이었습니다.
제아무리 들뜬 기분으로 떠난 여행이라 해도 하루하루 고된 여정에 지쳐 숙소에서 좀 쉬려고 하면 일본인들이 찾아와 글을 써 달라고 했으니 얼마나 답답했을까. 산 넘고 물 건너 드디어 뭍으로 이동하는 길에 나고야에 도착한 신유한은 여기서도 엄청난 글 부탁에 시달리게 됩니다.
“종이가 구름처럼 겹겹이 쌓였고 붓이 숲처럼 꽂혀 있었으나 이내 바닥이 나서 새로 들여왔다. 나도 이따금 갈증이 날 때마다 밀감을 까서 목을 축이며 시를 지어주었다. 상대방이 지은 시의 운자(韻字)를 따서 화답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는데 초고를 쓰고 다듬을 새도 없이 사람들이 소매에 넣어 가져가 버리니, 몇 편이나 썼는지 나도 알 수 없었다.”
흥미로운 것은 시를 써 달라는 부탁뿐 아니라 자식의 자(字)와 호(號)를 지어 달라는 일본인도 있었다는 점입니다. 나고야에 입성하기 전에 오사카에 닷새를 머무는 동안 천 리 밖에서 신유한을 찾아온 아버지와 아들이 있었죠. 신유한은 14살 난 아이의 글재주를 칭찬해주고 그 아버지의 부탁으로 아이의 자와 호, 그 의미를 설명한 글까지 별도로 지어줍니다. 조선에서 온 문인에게 자기 자식을 보이는 일이 당시 일본인들 사이에서 꽤 유행한 모양입니다. 일종의 ‘원포인트 과외’라고 할까. 평생에 이런 기회가 다시 올지 어떨지 알 수 없었으니 말이죠.
일본에서는 유학자나 문인이 사회적으로 높은 대접을 받지 못했습니다. 신유한의 기록을 보면 쇼군조차 한문을 몰랐고, 벼슬이 높은 이들 가운데도 글을 모르는 사람이 많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 문인이나 학자들 가운데 더 큰 배움을 향한 갈망이 컸을 테고, 조선 통신사의 방문은 그런 갈증을 조금이라도 풀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셈이죠. 반면 신유한 같은 제술관에게는 죽을 맛이었던 겁니다. 통신사 일행의 목적지 에도에서도 신유한은 ‘글 사역’에 시달립니다.
“매일같이 숙소에 있었더니 숙소에서 근무하는 사람들 가운데 시를 지을 줄 아는 이들이 연이어 찾아와서 시와 필담을 주고받느라 쉴 틈이 없어 괴로웠다. 또 외부 사람 가운데도 아메노모리 호오슈우와 두 승려에게 청탁하여 시문집의 서문이나, 그림에 붙이는 글이나, 초상화에 붙이는 글이나, 사물을 읊은 시를 받아 가고 싶어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들도 내가 손수 글을 쓰고 도장을 찍어 주기를 원하였기 때문에 나는 이 일에 골몰하느라 쉴 겨를이 없었다.”
써대야 할 글의 종류가 무척이나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글 쓰는 재주를 지닌 것이 그토록 괴로운 일이 될 줄을 누가 알았을까요. 물론 매번 괴로움만 호소한 것은 아니었지만, 과로에 지쳐 병이 날 지경이었으니 그 고통을 짐작조차 하기 어렵습니다.
“시와 글씨를 구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나는 과로로 병이 나서 사절하려 하였으나 어쩔 수 없이 억지로 응한 경우가 많았다.”
놀라운 것은 이렇게 써 준 신유한의 글이 일본에서 공식적으로 출판되는 ‘가공할 속도’였습니다. 어떤 이가 편지로 간절히 부탁해온 스승의 문집 서문을 써주었으니 얼마 뒤 출판된 책에 자기가 쓴 서문이 들어있더라는 얘기입니다.
“수백 글자나 되는 긴 편지로 나에게 서문을 청하였는데 그 뜻이 매우 간절하였기에 나는 마침내 서문을 지어 보냈다. 그런데 지금 와서 보니 그 서문이 이미 판각이 되어 나와 있었다.”
심지어 신유한이 서문을 써준 일본인의 문집은 천황까지도 보게 됩니다. 앞서 오사카에서 머물 때 신유한은 일본의 출판 시장에 관해 꽤 자세한 기록을 남겼습니다. 이미 당시에 일본은 이미 출판 대국이었던 겁니다. 신유한이 오사카에서 남긴 기록을 보면 당시 오사카에 상당히 번화한 서점가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화려한 저택과 정사들 사이에 서림(書林)과 서옥(書屋)이 있어, 유지헌(柳枝軒)이니 옥수당(玉樹堂)이니 하는 간판을 붙여 놓았다. 고금 여러 분야의 서적을 쌓아 두고 판매하거나 출판하여 막대한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중국의 서적과 우리나라의 여러 존경받는 학자들이 저술한 서적들 중에 없는 것이 없었다.”
여기서 특히 주목해야 할 것은 일본인들이 출판해서 사고판 조선 서적의 면면입니다. 역시 오사카에서 남긴 글에 나오는 대목입니다.
“오오사카에 서적이 많은 것은 실로 천하의 장관이라 할 만하다. 우리나라 명현의 문집 가운데 일본 사람들이 가장 존숭하는 것은 『퇴계집』(退溪集)이다. 그래서 집집마다 읽고 외우고 있다. 일본 문인들이 필담할 때 가장 먼저 묻는 것도 『퇴계집』의 내용에 관한 것이다.”
오사카의 어느 학자의 입에서 최치원, 설총, 김장생, 우탁, 이색, 김종직의 이름이 줄줄이 흘러나오자 신유한은 상당히 놀라워합니다. 통신사를 통한 교류가 일본에는 선진 학문을 받아들이는 좋은 기회였던 셈입니다. 하지만 두 차례 왜란을 일으킨 오랑캐의 나라에서 유통되는 책 가운데 유독 신유한의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있었으니.
“가장 통탄스러운 것은 김성일의 『해사록』(海槎錄),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 강항의 『간양록』(看羊錄) 등에 조선과 일본 사이의 기밀을 기록한 것이 많은데, 이 책들이 지금 모두 오오사카에서 출판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적을 정탐하여 적에게 일러주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우리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못하여 통역관들의 밀무역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니 두려운 일이다.”
통역관들의 밀무역을 통해 임진왜란을 다룬 책들이 버젓이 일본에 수출돼 읽히는 현실을 개탄한 거죠. 실제로 신유한은 일본인들을 ‘오랑캐’라고 부르며 노골적인 적개심을 곳곳에서 드러냅니다. 신유한이 일본을 방문한 것이 1719년이니 왜란이 끝난 지 어느덧 120년이 흘렀지만, 두 차례 왜란으로 조선이 입은 상처는 그만큼 크고 깊었습니다. 예컨대 일본의 군사적 요충지인 시모노세키에서 신유한은 이런 기록을 남겼습니다.
“옛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오사카를 도읍으로 삼고 함부로 무력을 남용했을 당시의 일을 떠올리니 두려운 생각에 오싹했다. (중략) 임진왜란 당시 히데요시가 배를 타고 여기를 지나가다가 암초에 부딪혀 배가 거의 부서질 뻔했다. 그러자 그는 즉시 뱃사공과 길잡이를 모두 베어 죽이고 암초 위에 비석을 세워 후대인이 보고 경계하도록 했다. 아직도 그 비석은 멀쩡히 서 있다.”
오사카를 떠나 나고야로 가는 길에 이런 일화도 적어 놓았습니다.
어떤 일본인이 이렇게 말했다.
“요도 강 기슭에 진주도(晉州道)라는 마을이 있는데, 임진년 전쟁 때 포로로 잡혀 온 진주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입니다. 지금도 그 마을에는 다른 지역 출신이 한 명도 없습니다.”
그때 당시의 일을 상상해 보니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래서 통신사 일행이 귀국길에 다이부쓰지(大佛寺)라는 절에 들르는 관행을 일본인들이 들먹이자 통신사는 단호하게 거절합니다. 이유는 히데요시였습니다.
“우리나라에 있을 때 듣기로 다이부쓰지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위패를 모신 곳이라 하였소. 이 도적이 우리나라에 끼친 해악은 백 년이 지나도 잊을 수 없으니 불구대천의 원수요. 하물며 그런 곳에서 술을 마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생각해 준 뜻은 고맙지만 사양하겠소.”
속이 탄 일본인들이 방법을 바꿔서까지 간곡하게 부탁해도 사신은 요지부동이었습니다.
“내가 결코 그 절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한 것은 의리로 볼 때 원수를 잊을 수 없기 때문이오. 혹 관백이 이 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할지라도 옳지 않은 일을 가지고 사람을 굴복시킬 수는 없는 법이거늘, 어찌 관백도 아닌 경조윤의 말을 듣고 다시 생각해 본단 말이오? 반드시 이 말을 에도에 아뢰어 일을 처리하시오. 만 리 바다를 건너온 우리는 죽고 사는 일을 터럭과 같이 하찮게 여기니, 비록 십 년을 머물더라도 굽히지 않을 것이오!”
꼿꼿하게 자존심을 지키는 사신의 모습입니다. 통신사 일행의 일본 기행문은 현재 40여 종이 전한다고 하죠. 그 가운데서도 《해유록》이라 불리는 신유한의 기록은 백미로 꼽힙니다. 예리한 관찰력에 뛰어난 문학성까지 겸비했기 때문입니다. 평생에 단 한 번밖에 오지 않을 일본 여행에서 신유한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일본 사회의 구석구석을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보고 듣고 기록합니다.
일본을 오랑캐라 부르며 과거의 원한을 떠올리는 대목에선 비분강개하는 모습도 서슴없이 드러내지만, 우리보다 더 나아 보이는 것에서는 배울 건 배우자는 실사구시의 자세도 곳곳에서 보여줍니다. 일본으로 떠나는 이들에게 신유한의 글이 필독서처럼 읽혔다는 말이 이해되죠. 이 책의 편역자는 그 비결을 ‘거리 두기’에서 찾습니다. 최근 코로나 19로 인해 유행어가 된 말이죠. 일본을 향한 적개심에 매몰되지 않고 사실은 사실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정직하게 관찰하고 기록한 자세를 높이 평가한 겁니다.
조선 통신사의 여정을 직접 답사하고 쓴 서인범의 《통신사의 길을 가다》(한길사, 2018)는 함께 읽으면 좋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에서 그동안 미처 몰랐던 새롭고도 놀라운 사실들을 알게 됐습니다. 어느 쪽이든 분명하게 깨닫게 되는 건 우리는 아직도 일본에 관해 잘 모른다는 겁니다. 1719년에 일본을 다녀온 조선 문인의 글에서 만나는 일본에 관한 예리한 통찰들은 그래서 300년이 지난 지금도 유효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