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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May 05. 2020

위대한 신라인 혜초를 만나다

한국인이 쓴 기행문학의 백미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혜초를 만나보자고 결심한 이유가 있습니다. 소설가 김탁환의 산문집 『아비 그리울 때 보라』에 소설 『혜초』를 집필한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이 나오지요. 이른바 가지 쳐 읽기입니다. 좋은 책은 한 발 더 나가 또 다른 책을 읽도록 독자를 부추깁니다. 제 독서 노트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소설 『혜초』가 읽어야 할 책으로 기록돼 있더군요. 또 기억을 더듬어 보니 언젠가 김탁환의 다른 소설에 관한 포스팅에 지인 한 분이 자기는 『혜초』를 참 재미있게 읽었다는 답글을 남긴 적이 있었습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것도 한몫 했습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럴듯한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2010년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두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열린 <세계문명전 실크로드와 둔황: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2010.12.18.~2011.04.03.)에 혜초의 여행기가 출품됐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파리국립도서관 소장본이 도서관 밖으로 나온 것도 처음이었고, 한국에 온 것도 처음이었으며, 일반인에게 공개된 것도 처음이었죠. 『왕오천축국전』 원본을 볼 수 있었던 건 크나큰 행운이었습니다. 이제 언제 다시 보게 될지도 알 수 없으니까요.      


인연의 독서입니다. 이런저런 이유가 거짓말처럼 얽히기도 하고 스스로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 붙이기도 하면서요. 그렇게 1300년 전 목숨을 건 인도 성지순례에 나선 위대한 신라인 혜초의 여정을 따라가 보기로 했습니다. 이 여정의 시작은 정수일 선생이 역주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입니다.     



이 책을 읽는 것은 단언컨대 ‘모험’입니다. 1908년 프랑스의 동양학자 펠리오가 중국 돈황석굴에서 발견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은 두루마리로 된 필사본으로 총 227행, 5,893자로 되어 있지요. 연구자들은 대체로 이 두루마리를 원본이 아니라 원본을 줄여 옮긴 ‘절략본’이자 ‘사본’으로 봅니다. 전해지는 과정에서 책과 저자 이름은 물론 본문 글자의 상당수가 떨어져 나갔기 때문입니다. 혜초가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시기가 723~727년이니 지금으로부터 무려 1300년 전의 기록입니다.     


역주자가 본문에서 거듭거듭 토로하듯 기본적으로 지금은 쓰이지도 않는 옛 한자가 워낙 많고, 음을 빌려 쓴 한자 인명과 지명을 해석하는 것도 난관이거니와, 옛 지명이 가리키는 곳이 지금의 어디인지 비정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난제입니다. 따라서 이 책은 한 줌도 안 되는 본문을 설명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분량의 역주를 달고 있는데, 그중 태반은 한자 해설이고 나머지 절반은 지명이 가리키는 위치를 비정하고 추적하는 내용입니다.  

   

게다가 역주자는 한 세기 동안 진행된 『왕오천축국전』에 관한 동서양의 연구 성과를 총망라해서 정리해놓기까지 했습니다. 한 개인이 이런 엄청난 지적 도전을 감당할 수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차라리 경외감마저 들지요. 그만큼 전문적인 내용이 많아서 반드시 읽어야겠다는 강력한 동기를 갖지 않고 덜컥 책을 펼쳐 들었다간 도중에 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럼에도 이 위대한 국보급 여행기는 더 많이, 더 오래 읽혀야 합니다. 이 기록을 남기기 위해 혜초는 목숨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록이 기적적으로 살아남았으니 읽는 데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지요. 이렇게 김탁환의 소설 『혜초』를 읽을 준비가 끝났습니다.     



독서는 여행입니다. 보름 남짓 두 사람이 연 길을 따라 책 속으로 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하나는 1300년 전 신라 승려 혜초의 여행기였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1300년 뒤 혜초의 길을 되밟은 소설가의 여행에 대한 여행이었죠. 여행이란 것은 결국 여행과 이야기. 소설의 뒷부분에서 작가는 이 두 가지 화두에 대한 자기 생각을 풀어놓았습니다. 먼저, 이야기. 혜초는 여행길에 만난 신라 상인 김란수가 왜 자기를 죽이지 않는지 궁금해합니다. 그 물음에 김란수는 짧게 대답하지요.     


“이야기 때문이지.”     


여행자 혜초의 이야기를 자기 것으로 소유하고픈 욕망 때문이었던 겁니다. 혜초의 기억과 자취를 훔쳐다가 ‘이 세상 최고의 여행자’가 되겠다는 욕심을 품은 거죠. 혜초의 여행은 그 얼마나 위대한 것이었던가요. 다음은 여행. 파미르고원을 넘은 고구려 출신 장군 고선지가 혜초에게 묻습니다. (물론 소설이기에 가능한 설정입니다.) 왜 여행에 집착하느냐고. 그 물음에 혜초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낯선 이의 따듯한 배려 때문입니다.”     


한 줌의 기록으로만 남은, 1300년 전 당나라를 떠나 다섯 천축국을 여행한 한반도 최초의 ‘세계인’ 혜초의 삶을 소설로 되살리기 위해 김탁환 작가는 학고재 판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의 역주자 정수일 선생과 직접 혜초의 길을 더듬어가는 답사에 나섰다고 했습니다. 구도의 길에서 작가가 본 것은, 아니 작가가 써 내려간 문장 속에서 혜초가 깨달은 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우리네 삶이 아름다우면 그네들 삶도 아름답고, 우리네 삶이 비루하면 그네들 삶도 비루하고, 우리네 삶이 슬프면 그네들 삶도 슬프고, 우리네 삶이 영악하면 그네들 삶도 영악하고, 우리네 삶이 힘겨우면 그네들 삶도 힘겹습니다. 부디 이 글을 두루 살피시고 파밀 고원 동편과 서편에 사는 이들이 상생하는 방도를 찾으셨으면 합니다. 장군, 저와 나눈 우정을 아끼신다면 약조해 주십시오. 대유사와 파밀에 억울한 피를 부르는 전쟁이 터질 조점이 보인다면 나서서 막겠다고. 언제나 평화의 편에 서겠다고.”     


이 여행을 끝내기 위해선 아직 책 한 권을 더 읽어야 합니다. 앞서 소개한 2010년 국립중앙박물관 전시 도록입니다. 10년 전 도록은 틀림없이 쓰레기통으로 갔을 텐데, 10년 뒤에 다시 그걸 찾게 된 겁니다. 그것도 인연이라면 인연일까요. 다행히 국립중앙박물관의 호의로 도록을 한 부 손에 넣었습니다.     



정수일 선생의 역주본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시작한 제 여행은 김탁환의 소설 『혜초』를 지나 도록 『실크로드와 둔황 : 혜초와 함께하는 서역기행』까지 왔습니다. 이로써 연결의 독서를 일단 마무리하기로 합니다. 이제 시간을 두고 그 세 권을 찬찬히 다시 들여다보면서, 책과 다른 책과 또 다른 책 사이를 이리저리 넘나들며 이 글을 씁니다. 실낱같은 인연의 끈이 기적처럼 이어지고 또 이어져 1300년 전 불법을 구하기 위해 목숨을 건 여행길에 나선 도축승 혜초의 기록을 만나는 흥분과 감동을 되새기면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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