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을 근대로 불러낸 최초의 인물은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입니다. 단재는 500년 조선 왕국의 명맥을 이은 대한제국의 숨이 다해가던 절체절명의 시기에 이순신을 역사의 무대로 다시 불러냅니다. 1908년 금협산인이란 필명으로 국한문판 『대한매일신보』에 5월 2일부터 8월 18일까지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을 연재합니다. 이와 겹치지만 조금 늦은 시기에 한글판 『대한매일신보』에 누군가 우리말로 옮겨 연재합니다. 흔히 단재가 쓴 이순신 텍스트라 하면 전자를 가리킵니다.
단재의 이순신은 한국인이 쓴 이순신 서사의 원점입니다. 더구나 단재라는 커다란 인물이 썼다는 사실 때문에 그 의의가 한층 더 각별합니다. 하지만 단재가 쓴 텍스트를 접할 수 있는 통로가 없었습니다. 1908년 신문의 원문 텍스트를 일일이 찾는 것도 쉽지 않을뿐더러, 단재가 구사한 국한문 혼용체는 지금의 한국인에게는 해독조차 쉽지 않은 말 그대로 ‘넘사벽’입니다.
이순신 텍스트를 이것저것 찾아 읽으면서 제가 가장 답답했던 부분입니다. 아니, 말끝마다 이순신을 민족의 영웅이니 어쩌니 하면서 침이 마르도록 칭찬만 했지, 이순신의 사람됨이 어떠했는지, 이순신의 업적은 무엇인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얼마나 될는지요. 게다가 제대로 알고 싶은 사람들조차도 어떤 텍스트를 어디서 어떻게 구해다 읽어야 할지 난감합니다. 텍스트 자체가 워낙 빈약하니까요.
저 또한 단재의 이순신에 관한 갈증이 그만큼 컸습니다. 그러던 차에 이 책이 어느 날 제게 온 겁니다. 구하는 이에게 주신다던 말씀이 불쑥 생각나더군요. 더구나 1급의 문학평론가가 단재의 이순신 텍스트가 등장한 전후 맥락은 물론 본문의 내용까지 정치하게 분석해 놓았으니 이보다 더 좋은 마중물이 또 있겠나 싶습니다. 저자의 분석을 요약하면, 단재의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은 이순신의 『난중일기』와 이순신의 조카가 쓴 최초의 이순신 전기 「이충무공행록」을 바탕으로 쓴 이순신 전기입니다. 저자의 말입니다.
“단재는 기존 기록들에 통찰을 가하여 다시 쓰든가 또는 사료 비판을 통해 취사하든가, 이 두 방식으로 전을 재구성한 바, 『이순신』(『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은 기본적으로 훌륭한 문학적 전기다.”
저자가 강조하는 핵심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 단재는 이순신에 관한 신화화된 낭설에 휘둘리지 않고 자기 시각으로 이순신을 쓰는 데 충실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단재의 이순신 텍스트가 가진 가장 큰 미덕은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한으로 고독한 영웅주의, 또는 허무의 개인주의로 질주하는 춘원류 이순신상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될 수 있었던 것”이라고 말합니다. 둘째, 저자는 단재의 이순신이 가진 가장 큰 한계로 반전(反戰) 사상의 부재를 지적합니다. “위대한 전쟁문학은 위대한 반전문학이다. 『이순신』에는 반전사상이 빈약하다.” 여기에 동의하고 않고는 독자들이 직접 읽고 판단할 일입니다.
저는 단재 신채호가 쓴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의 원문을 읽을 수 있었다는 점만으로도 저자에게 절을 하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만큼 기다렸던 이순신 텍스트였기 때문입니다. 이 책은 신채호의 원문을 현대어로 마음껏 읽을 수 있게 해준다는 점 하나만으로 읽고 소장할 가치가 충분합니다. 게다가 저자는 친절하게도 여기에 더해 벽초 홍명희의 『임꺽정』을 시작으로 환산 이윤재의 『성웅 이순신』, 춘원 이광수의 『이순신』, 구보 박태원의 『임진조국전쟁』, 노산 이은상의 『성웅 이순신』, 김지하의 「구리 이순신」, 김탁환의 『불멸의 이순신』, 김훈의 『칼의 노래』까지 단재 이후 이순신 서사가 변모해온 과정을 두루두루 살펴 정리해 놓았습니다. 참고로 저자는 김탁환보다 김훈의 소설에 더 호의적입니다.
저자는 특히 단재 이후 최고의 이순신 전문가인 소설가 구보 박태원(1909~1986)이 이순신 조카가 쓴 최초의 전기 「이충무공행록」에 가한 역주에 주목합니다. 구보의 「이순신」은 을유문화사에서 1948년에 펴냈습니다. 저자는 구보의 텍스트를 이렇게 평했습니다.
“‘과연 구보다’ 하는 감탄이 절로 나올 정도로 번역이며 주가 모두 훌륭하다. 그 뒤 여러 번역이 나왔지만 구보를 넘는 본을 보지 못했다.”
그러면서 그 원문까지 실어 놓았습니다. 게다가 말미에 언급된 일본인 오다 마코토의 『소설 임진왜란』에 대해선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뒤늦었지만 이 전란을 볼 하나의 근본적 관점을 제시한 아주 훌륭한 소설을 읽게 되어 한국 독자로서 감사하다고 대답하고 싶다. 삼가 명복을 빈다.”
저자의 이 한마디는 소설을 읽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들었습니다. 『난중일기』를 정독한 이후 조선시대 기록부터 소설까지 이순신에 관한 텍스트를 부지런히 찾아 읽어오던 차에 이 책만큼 절묘한 시기에 절묘한 방법으로 제 갈증을 풀어준 것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다른 이순신 텍스트의 존재를 알게 된 것도 큰 수확이었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