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식의 첫 소설집에 실린 첫 단편소설의 첫 문장은 자못 의미심장합니다. 작가의 의도인지, 편집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소설집의 표제이기도 한 ‘회색인간’의 첫 문장은 ‘문화의 쓸모’를 언급하죠. 땅속 세상, 즉 지저 세계에 납치된 지상의 인간들은 땅 파는 노동을 강제당합니다. 지상에서 지하로 ‘추락한’ 인간들의 삶은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희망이라곤 안 보이는 그 절망의 구렁텅이에서 어느 날, 누군가, 노래를 부릅니다. 예수에게 돌을 던지듯, 사람들은 노래를 부른 여인에게 돌을 던집니다. 그러다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죠. 제 배를 채우기에도 턱없이 모자란 빵을 누군가가 노래하는 여인에게 준 겁니다. 노인은 화가에게, 중년 여인은 소설가에게 빵을 줍니다. 기적이 일어납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조금씩 변해 갑니다. 문화는 삶을 견딜 수 있게 하고,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힘이라는 것을 이 짧은 소설은 감동적으로 보여줍니다. 소설의 마지막 문장들입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죽어나갔고, 여전히 사람들은 배가 고팠다. 하지만 사람들은 더 이상 회색이 아니었다. 아무리 돌가루가 날리고 묻어도, 사람들은 회색이 아니었다.
단편소설 치고도 분량이 짧은 24편이 소설집으로 묶였습니다. 기발하고 신선합니다. 글쓰기를 배운 적 없는 주물공장 노동자라는 특별한, 아니 특별할 것 없는 이력을 가진 김동식 작가의 작품은 길들지 않은 야생의 풋풋한 감수성을 보여줍니다. 작가가 ‘오늘의 유머’ 커뮤니티에 첫 소설을 올린 것이 2016년 5월 13일. 이후 1년 반 동안 300편이 넘는 단편을 올렸다니 창작열로만 보자면 화수분이나 다름없죠. 2017년 이후 ‘요다’에서만 소설집 8권이 나왔습니다.
그 사이에 작가의 세계가 얼마나 단단해지고 깊어졌는지 확인하려면 전작을 읽는 수밖에 없습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말이죠.
배명훈의 첫 장편소설의 첫 장의 첫 문장들입니다. ‘동원 박사 세 사람’이란 부제가 연상시키는 예사롭지 않은 기운은 소설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무한 기대감을 갖게 하죠. 674층짜리 빌딩에 50만 명이 모여 사는 자치 국가의 이름은 빈스토크 타워. 바벨탑에 비유되는 이 초고층 건물의 구조를 작가는 섬세하게 해부해 나갑니다.
타워는 ‘저소공포증’이란 새로운 질환의 진원지였고, 수직 권력과 수평 권력이 복잡하게 충돌하는 욕망의 용광로이기도 하죠. 수직운송조합, 수평운송노조, 『수직자본론』 등의 개념들은 물론 수평 구조 연구의 산물인 『520층 연구』가 군대 반입 금지 도서로 지정된다는, 시대와 조응하는 설정들은 의미심장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작가는 2009년 초판 서문에서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신 L씨의 건강을 기원합니다.”라고 적어 도대체 L 씨가 누군지 궁금증을 불러일으켰죠. 작가 스스로 신판 서문에서 수수께끼 L 씨의 정체를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초판 작가의 말」에서 언급한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신 L씨”는 2020년 현재 가택 연금 상태인 전직 대통령이었음을 밝힙니다. 일부 독자가 상상한 로맨틱한 뒷이야기는 아니지만, 10년 전의 제가 이런 이상한 이야기를 쓰게 된 배경을 오해 없이 밝히기 위해 기록해둡니다.
타워는 시대적 맥락 안에서 진지하게 읽혀야 할 소설입니다. 굳이 장르소설이라는 딱지를 붙이지 않아도 좋을 만큼 훌륭한 데뷔작이기도 하고요. 소설가 정세랑이 “배명훈은 한국 SF계의 핵심 부품이다.”라고 평가한 것이 틀리지 않았음을 이 소설 한 편으로도 분명하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소설 안에는 작가의 문학론으로 보아도 좋을 대목이 있습니다. 등장인물 가운데 한 명인 D라는 소설가의 입을 빌어 써내려간 아래의 문장들은 작가 자신의 생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걸로 보입니다. 조금 길지만 전문을 옮겨 놓습니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소재들을 하나하나 끄집어냈다. 각각의 소재마다 이야기들이 붙어 있었다. 어떤 소재에는 꽤 긴 이야기가 붙어 있었고, 어떤 소재에는 바로 앞에 일어난 일과 바로 다음에 일어날 일 정도밖에 붙어 있지 않았다. 완결된 이야기 한 편이 통째로 붙어 있는 소재는 없었다. 그런 게 있다면 작가는 존재할 필요가 없다.
그 짤막한 이야기들은 따로 떨어져 있던 소재들을 서로 이어붙이는 연결 고리 역할을 하곤 했다. 그래서 시간이 지나면 따로 노력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꽤 큰 이야기 덩어리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는 머릿속을 들여다보았다. 이만하면 바로 쓸 수 있겠다 싶은 큰 덩어리가 세 개나 떠다녔다. 그중 하나는 자판에 손만 대면 글이 저절로 와르르 쏟아져 나올 것처럼 거의 온전한 형태를 갖춘 이야기였다.
시장과 엘리베이터!
장강명의 단편 <알골>의 첫 문장입니다. 이 소설집은 2015년에 같은 출판사에서 낸 슈퍼히어로 단편 모음집 《이웃집 슈퍼 히어로》의 후속편 격입니다. 장강명, 구병모 등이 새로 합류하면서 무게감을 더했죠. 수록된 작품은 모두 8편. 이 가운데 몇은 앞의 소설집에도 참여한 작가들이 전작의 속편 또는 프리퀄임을 밝혀 놓았습니다. 작품 하나하나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기발한 발상과 더불어 시대와 호흡하는 진지함을 보여줍니다.
소설집의 표제가 된 임태운 작가의 〈근방에 히어로가 너무 많사오니〉에는 슈퍼히어로를 호출하는 어플 ‘히어로콜’은 물론 공인된 히어로들만 가입할 수 있다는 히어로톡 단톡방까지 등장해 웃음을 자아냅니다. 신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설화의 모티브를 끌어들인 곽재식 작가의 〈영웅도전(英雄盜傳)〉은 흡사 홍길동전을 읽는 듯한 즐거움을 줍니다. 옛 문헌의 기록을 꼼꼼하게 읽고 추론해나가는 작가의 안목이 예사롭지 않죠.
한 달에 한 번 마법에 걸리는 여성 히어로의 ‘생활 조건’을 반영한 <월간영웅홍양전>의 dcdc 작가는 이번에도 기대에 어긋나지 않는 작품을 선보였습니다. 이름하여 〈주폭천사괄라전〉.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단편은 작가의 「경기 히어로 연대」 연작 중 두 번째 작품이라는 군요. 연작을 읽지 않을 도리가 없습니다.
국내 최대의 초인커뮤니티 이름을 ‘초밥’으로 지은 김보영 작가의 작품이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합니다. 김보영의 작품은 전작을 읽을 가치가 충분하죠. 《이웃집 슈퍼 히어로》에 실린 듀나 작가의 <아퀼라의 그림자>와 김보영 작가의 <세상에서 가장 빠른 사람>은 그해 SF어워드 우수상을 받았고, 김이환 작가의 <초인은 지금>은 장편으로 개작돼 두 해 뒤 마찬가지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제가 좋아해 마지않는 dcdc 작가의 <월간영웅홍양전>은 낭독공연으로 만들어지기도 했답니다.
책을 덮으면서 이 소설집의 기획자 김보영의 글 마지막 문장들을 다시 음미해 봅니다. 장르를 뛰어넘는 소설의 세계를 펼쳐 보이는 작가들의 진지한 문제의식과 고민에 박수를 보냅니다.
책 속에서는 히어로들이 초능력을 쓰고, 날아다니고, 결투를 벌이지만, 여전히 이들의 삶은 현대 한국과 우리가 당면한 문제들을 반영한다. 세상이 변화하면 히어로들의 고민도 변화한다. 싸워야 할 적과 문제도 변화한다.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그들은 여전히 열심히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