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진왜란 때 실종된 5살 고아의 기막힌 사연
“아들아, 지금부터 이 애비가 하는 말 잘 듣고 새겨야 한다. 이건 우리 가문의 족보다. 혹시라도 니 애미나 형들과 헤어지게 되면 이 족보를 꺼내 사람들에게 보여주거라. 이 족보만 있으면 어디서든 식구들을 다시 찾을 수 있을 게다. 가슴에 꼭 품고 절대로 잃어버려선 안 된다.”
울먹이는 5살 아들은 아버지의 신신당부가 무슨 말인지 알아들었을까요. 아직 세상 물정 모르고 지각도 없는 어린 아들이 행여나 피난길에 무슨 일이라도 당할까, 아버지는 작은 족보를 만들어 아들의 옷깃 속에 꿰매 넣어 줍니다. 때는 1592년 4월 19일. 왜구가 부산으로 쳐들어와 이미 곳곳이 함락됐다는 긴박한 소식이 전해지자, 안동에 세거하던 의성김씨 가문의 선비 김용(金涌, 1557~1620)은 풍전등화의 운명에 놓인 조국을 구하기 위해 분연히 의병(義兵)을 일으킵니다.
김용은 싸우러 나가기 전에 아내와 아들들을 피난시키기로 합니다. 유난히 아들 복이 많아 슬하에 아들자식만 6명. 첫째가 18살, 둘째 17살, 셋째와 넷째가 14살, 다섯째가 11살, 그리고 막내가 5살이었죠. 열 살을 넘긴 아들들이야 걱정이 없었지만, 아직 코흘리개인 5살 막내가 눈에 밟혔습니다. 그래서 작은 족보를 따로 만들어 아들의 품에 넣어 줍니다. ‘미아 방지용’이었던 셈이죠.
선조들의 이름과 이력, 아들 형제들의 이름, 관직명 등을 빠짐없이 기록한 뒤, 김용은 이 작은 족보를 만든 이유도 같이 적어 놓았습니다.
“만력 임진(선조 25년 1592) 4월 19일, 왜구가 침입하여 이미 여러 진지가 함락됐다는 소문을 듣고, 내일 청송 산골로 가족을 피난시키려 한다. 난리 중에 갑자기 서로 헤어져 뜻밖의 일이 일어날지 모르고, 자녀들이 아직 어려 지각이 없는 아이가 있으니, 뒷날 증거로 삼기 위해 난수에게 차도록 한다.”
난수(鸞壽)가 바로 5살짜리 아들의 이름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선견지명이었는지, 피난민들이 자고 있던 산속 임시거처에 어느 날 밤 왜적이 쳐들어와 불을 지르고 약탈을 자행합니다. 잠결에 놀라 달아나는 아수라장 속에서 가족들은 그만 막내 난수를 잃어버리고 말죠. 그 와중에 가족과 헤어진 5살 난수는 다행히 목숨을 건집니다. 하지만 도망치는 과정에서 옷에 불이 붙는 바람에 옷깃 안에 간직했던 족보가 상당 부분 타버립니다.
난수는 하루아침에 천애 고아가 되어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구걸로 연명합니다. 고작 5살짜리 어린이가 감당하기엔 너무나도 가혹한 시련이었죠. 그러던 난수를 안타깝게 여겨 거둬준 건 김해 김씨 성을 가진 어느 농부였습니다. 전쟁 통에 자식을 모두 잃은 농부는 우연히 자기 마을로 흘러든 난수를 수양아들 삼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돌봅니다. 반면 이런 사실을 까맣게 몰랐던 난수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가슴에 한을 품은 채 살아야 했죠.
그렇게 김난수는 김해 김씨 농사꾼으로 삽니다. 반세기 가까운 세월이 흘러 김난수의 나이 54살 때 삼촌뻘인 승려 혜징(惠澄)이 수양 조카인 난수에게 새 이름을 붙여준 전후 사정을 담아 <수양질시과별급문권서 收養侄是果別給文券序>란 글을 써 줍니다. 해석하면 ‘수양 조카 시과에게 따로 써서 주는 글의 서문’입니다.
“우리 집 형이 자녀 몇을 두었는데 병란 중에 다 잃어버리고, 다행히 달아나 숨는 와중에 너를 얻어 비록 누구의 자식인지 알지 못하나 그 타다 남은 족보의 조각에 남아 있는 글자를 살펴보면 분명히 훌륭한 선비의 집 아이이다. (중략) 아! 난수는 너의 어릴 적 이름이다. 세상에 행할 이름이 없을 수 없다. 그 본가 항렬을 따라 너의 이름을 시과(是果)라 하고, 너의 자(字)를 석여(碩汝)라 한 것은 큰 과실이란 뜻을 취한 것이다.”
김난수는 이렇게 김해 김씨 집안의 양자로 일찌감치 새 이름을 얻어 김시과(金是果)라는 이름으로 살았습니다. 아마 글을 배우진 못했겠죠. 평범한 농사꾼 집안에서 자랐으니까요. 그렇지만 김시과는 5살 때 가족과 생이별한 뒤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도 끝끝내 지켜낸 족보와 김해 김씨가 된 이후 의붓 삼촌이 지어준 글을 상자에 담아 고이고이 간직합니다. 의성김씨 김난수였던 김해 김씨 김시과는 1653년, 66살 나이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제 이야기는 1777년으로 훌쩍 넘어갑니다. 김시과가 세상을 떠나고 124년이 지난 그해, 김시과의 7대손인 김순천(金順天)의 아내가 깊이 병들어 죽게 생깁니다. 그래서 점쟁이를 찾아가 점을 치죠. 점쟁이는 이렇게 말합니다.
“댁에 오래된 상자가 하나 있지 않소? 그것 때문에 부정을 탄 게요. 당장 없애버리시오!”
집으로 돌아온 김순천이 대들보 위에서 잔뜩 먼지 쌓인 작은 상자를 내려 불에 태워 버리려고 열어봅니다. 불에 타다 만 작은 책과 오래된 문서 한 장이 들어 있었죠. 농사꾼의 후손인 김순천은 까막눈이었습니다. 뭔지는 몰라도 아버지가 물려준 집안 물건이니 버리지 않고 간직했겠죠. 점쟁이는 태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때 옆집 사는 노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이건 자네 집안에 대대로 내려오는 물건인데, 글도 읽을 줄 모르는 자네가 뭔지도 모르고 마구 태워 버려서야 되겠나? 글을 아는 사람한테 가서 물어본 뒤에 태워도 늦지 않을 걸세.”
노인의 말이 옳다고 여긴 김순천은 글 읽는 선비 이우량(李宇亮)을 찾아가서 봐달라고 부탁합니다. 족보와 문서를 살피던 이우량은 깜짝 놀랍니다. 자기 외가 쪽 족보였기 때문이죠. 이우량은 안동 천전리에 뿌리내리고 살던 의성김씨의 외손이었습니다. 당시 문경(聞慶)에 살고 있던 이우량은 즉시 안동 천전에 있는 문중(門中)에 보내는 편지를 써서 김순천에게 건네주고 문중을 찾아가라고 합니다.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는 몰라도 그로부터 또 20여 년이 지난 1805년이 돼서야 김순천은 불에 타다 만 족보, 오래된 문서 한 장, 그리고 이우량이 써준 편지를 들고 안동 의성김씨 종가를 찾아갑니다. 문중 사람들이 족보를 자세히 뜯어보니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킨 가문의 자랑스러운 선조 김용 선생의 필적이 분명했죠. 그리고 불에 타지 않은 선조의 글을 통해 족보가 만들어진 내력을 확인하게 됩니다. 문중에선 즉각 문경현감에게 자초지종을 담은 진정서(所志)를 올립니다.
“어찌나 다행스러운지 하늘의 도가 돌고 조상의 영령이 몰래 도와 최근에야 비로소 불타다 남은 족보를 가지고 안동 천전에 가서 검토해본 결과 세대와 이름, 관직, 생몰연대, 묘소 등이 뚜렷하고 분명해서, 선조의 계보가 의성김이라는 것을 살피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종족이 서로 만나게 되니 눈물을 흘리고 감격하여 마치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난 듯 그지없었습니다. (중략) 이에 가정에 전하는 불탄 족보와 저희 족보를 함께 올리며 그 전말을 말씀드리니, 이제부터 의성(義城)으로 본관을 회복하도록 증명서를 내려주시기를 간절히 빕니다.”
그러자 문경 현감은 다음과 같은 명령서를 써줍니다.
“문서와 300년 전 불타고 남은 책자를 고찰해 보면 참으로 이것은 드물게 있는 기이한 일이다. 7대 동안 서민으로 있다가 이제야 옛 성을 되찾아 갑자기 문벌의 후예가 되었으니, 이것은 대개 운천 공(김용)께서 일을 세밀하고 삼가 처리하신 공이다. 김씨 성은 비록 같으나 본관을 되돌리는 것은 명령서 하나로만 시행할 수 없으므로 감영 및 서울에 올려 여러 가지를 비춰 검토하도록 하는 것이 마땅하다.”
드디어 9부 능선을 넘은 셈이죠. 문경현감은 아울러 불에 타다 남은 족보를 수리하고 떨어져 나간 부분은 다시 채워 넣어 어엿한 모습으로 단장하게 했습니다. 문경현감이 내린 조처에 따라 의성김씨들은 다시 경상감영에 청원서를 내 족보를 합쳐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죠. 아울러 이 놀라운 사실을 조상에게 고하는 고유제(告由祭)를 올립니다. 참석한 이들 모두 감격에 젖어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이 기막힌 사연은 예조(禮曹)에까지 보고됩니다. 결국, 나라에선 사실관계에 문제가 없음을 확인하고 의성김씨로 다시 복권된 이들의 부역과 군역 의무를 면제해주는 것으로 이 놀라운 기적에 화답합니다. 이렇게 예조의 증명서까지 받아냄으로써 5살 나이에 부모 형제와 헤어져 다른 집안사람으로 살아야 했던 김난수, 즉 김시과로부터 7대에 이르는 후손들은 다시 의성김씨로 돌아옵니다.
자그마치 213년 세월이 걸렸죠. 드라마보다 더 드라마 같은 사연이 아닐 수 없습니다. 기적을 만든 족보는 불에 타다 말았다고 해서 화여세계(火如世系)란 이름을 얻었죠. 제게 이 놀랍고도 놀라운 사연의 존재를 일러준 건 세계적인 한국학자 마르티나 도이힐러(Martina Deuchler) 교수가 쓴 회심의 역작 《조상의 눈 아래에서》(너머북스, 2018)였습니다. 도이힐러 교수는 안동 지방을 중심으로 엘리트층의 형성과 전개 과정을 치밀하게 살피면서 가문의 일원으로서 정체성을 상실했다가 회복하는 드문 이야기로 이 일화를 소개해 놓았습니다.
여기서 도이힐러 교수가 본 논문은 1993년에 경북대학교 퇴계학연구소가 발간하는 잡지 『퇴계학과 유교문화』 통권 21권에 실린 김시황 전 안동대 교수의 논문 ‘의성김씨 화여세계(義城金氏 火如世系)’였습니다. 논문을 구해 읽으면서 이렇게 전율한 적이 있었던가 싶네요. 시종일관 ‘기적’으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는 장면들의 연속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들을 하나하나 더듬으며 실로 많은 것을 생각하고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비극인 동시에 새로운 희망의 시작이었습니다.
※ 이 글은 KBS 뉴스 홈페이지(news.kbs.co.kr)에 먼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