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탁환․정재승 『눈먼 시계공』(민음사, 2010)
이 소설을 쓴 이는 두 명입니다. 소설가와 과학자.
생명 진화의 비밀을 다룬 리처드 도킨스의 동명 저작에서 제목을 따왔다고 합니다. ‘시계공’이란 표현은 창조론을 주장한 19세기 신학자 윌리엄 페일리의 논문에서 가져온 거라고 하는군요. 소설은 다음과 같은 의미심장한 인용문으로 시작하죠.
“인간은 한때 모든 신비로운 존재 중 가장 위대한 존재로 알려졌다. 그러나 나는 우리 자신의 존재가 더 이상 신비하지 않다는 확신이 생겼다. 왜냐하면 그 비밀이 이제 풀렸기 때문이다.”
때는 2049년. 서울특별시 보안청 소속 은석범 검사는 미래의 과학 기술을 기반으로 한 비밀 특별 수사팀을 꾸립니다. 이름하여 스티머스(STEMERS). 풀어서 쓰면 숏트텀 메모리 리트리벌 시스템(short-term Memory Rerieval System). 옮겨 쓰면 단기 기억 재생 장치. 스티머스팀은 갓 사망한 피해자의 뇌에 가장 최근 주입된 기억을 뽑아내 영상으로 재생하는 장치의 도움을 받아 범인을 잡아냅니다. 이 설정, 어디서 본 것도 같죠. 영화 <지아이조 G. I. Joe>(2009)에 비슷한 기억 재생 기술이 등장합니다.
소설의 핵심 소재가 된 로봇 격투기 장면에선 영화 <리얼스틸 Real Steel>(2011)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되죠. 손상된 장기를 기계로 대체한다는 설정은 이미 <리포 맨 Repo man>(2010)과 같은 영화에서 섬뜩하게 묘사된 바 있습니다. 소설이 그리는 2049년의 미래에선 신체에서 기계가 차지하는 비율이 70%가 넘으면 시민권을 박탈합니다.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다는 뜻이죠.
<터미네이터: 미래 전쟁의 시작>(2009)에서 마커스(샘 워싱턴 분)가 스카이넷 본부에 접근하려다 파수꾼 로봇에게 스캔을 당하는 장면이 떠오릅니다. 기계만 통과할 수 있는 출입문이 열렸을 때 마커스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군요. ‘기억’에 관한 대목에선 절대 빠질 수 없는 필립 K. 딕의 단편 <도매가로 기억을 팝니다>도 언급되죠. 소설은 이런 장르적 유산을 자유롭게 유영합니다.
그런가 하면 절단된 신체 부위를 접합하거나 이식하는 단계를 넘어 ‘머리를 이식한다는’ 무시무시한 설정도 나옵니다. <로보캅>(1987) 1편에 그 실마리가 보이고, 1990년에 개봉한 2편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악질 범죄자의 뇌를 로봇에 심어 살상 무기로 활용합니다. 작가들은 특히 이런 개념을 선구적으로 제시한 문학 작품으로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중요하게 언급합니다.
“프랑스 혁명이 끝나고 30년 후,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이 출판되었다. 이 소설은 현대 외과 의학이 사실은 프랑스 혁명에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시체의 신체 부위별 실험을 통해 발전했다는 끔찍한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소설 속에서 머리 이식을 최초로 시도한 문학적 외과 의사였다.”
개인적으로 격투 로봇 이름에 실제 격투가들의 이름을 붙인 대목이 무척이나 흥미로웠습니다. 로봇 격투기 해설 위원 미르코 크로캅, 격투 로봇 밴너 사바테 5, 무사시, 반달레이, 그리고 거구의 슐츠까지…. 격투기를 좋아하는 분들에겐 추억의 이름들이죠. 대중적인 장르 소설의 거의 모든 것을 보여주겠다는 듯 뜻밖의 설정들이 흥미를 더합니다. 가축의 피를 요리하는 것이 금지된 2049년의 미래에 수사팀이 가장 즐겨 먹는 음식이 다름 아닌 선지해장국이라니!
과학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작가와 문학에 유달리 관심이 많은 과학자가 함께 만들어낸 이 소설은 서로 다른 영역의 전문가들 사이의 ‘협업’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우는 결과물입니다. 이야기는 좀 더 장르에 충실해지고, 과학은 좀 더 대중의 눈높이에 가까워지는 셈이죠. 물론 이 소설이 보여준 성취가 문학과 과학 사이의 적절한 지점을 포착했는지 판단하는 일은 순전히 독자의 몫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