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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석 Jun 16. 2020

“아빠! 제가 사진을 찍어 드릴게요.”

신정식 『함께한 계절』(보스토크프레스, 2020)

언제부턴가 아빠는 침대에 누워만 계셨다죠. 하루를 대부분 텔레비전 앞에서 보낼 수밖에 없었던 아빠. 하지만 텔레비전은 혼자 켜져 있기 일쑤였고, 아빠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쳐다보거나 주무실 때가 더 많았답니다. 서울에서 내려와 함께 지내던 아들을 배웅하려고 현관문을 열었다가도 옆집에서 사람이 나오자 조용히 문을 닫으신 아빠. 사람 만나는 걸 그리도 좋아했던 아빠. 이제는 자신이 없는지 사람을 자꾸 피하는 아빠였죠.     


 


어느 날 제 손에 쥐어진 사진집 한 권. 평범한 누군가의 평범한 얼굴로 가득한 사진집을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후루룩 넘겨보곤 한쪽으로 치워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사진들이, 특별할 것 없는 그 사진들이 자꾸만, 자꾸만 걸리더군요. 뭔가 강한 자석에 끌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다시, 찬찬히 사진을 들여다봤습니다. 사진이 건네는 말에 귀를 기울였더니 어느새 마음이 움직이기 시작했죠.     


2018년 봄, 벼락처럼 찾아온 알츠하이머 치매. 그리고 그 이후에 아들과 아빠 사이에서 일어난 일들. 그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보기로 했습니다.     


 


가끔은 '아빠의 아빠'가 된 것 같다. 외출할 때 입으실 옷을 미리 준비해놓고, 주무시기 전에 양치하는 것을 잊지 않도록 알려드린다든지, 아빠를 어린아이처럼 돌보기 때문만은 아니다. 고기를 먹을 때에는 맛있는 부위를 아빠에게만 드리고, 내 운동화보다 훨씬 더 좋은 걸 사서 드리는 일처럼 내 마음이 아빠를 먼저 챙길 때 '아빠의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치매는 아빠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습니다. 휴대전화 충전을 못 하시거나, 회를 소주에 찍어 드시고 소주는 숟가락으로 떠서 마시거나, 혼자서 안전띠를 못 매셨고, 사물의 이름은 물론 숫자까지도 못 알아보신다고 합니다. 씻고, 입고, 먹는, 지극히 사소한 일상조차도 엄청난 스트레스가 돼버린 현실. 아들은 아빠가 운동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운동하러 가요! 하지만 아빠는 요지부동. 싫어! 난 건강해!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은 아빠에게 이렇게 제안합니다. "아빠! 사진 찍으러 가자!" 그런데 그동안 방안에서 꿈쩍도 안 하던 아빠가 드디어 이 말에 반응을 보입니다. 사진 찍는 걸 유난히 좋아했고, 늘 캠코더를 들고 다니며 가족의 모습을 찍어주시던 아빠에게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 떠오른 걸지도 몰랐죠. 그렇게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갑니다. 아들은 아빠의 사진을 찍기 시작합니다. 아빠와 아들의 '사진 여행'이었죠.     


   


바늘구멍으로 세상을 바라보기, 아빠의 시야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식사를 할 때마다 당신의 눈앞에 어떤 음식이 있는지 계속 이야기를 해드려야 했다. 하지만 그중 대부분은 금세 잊어버리곤 하셨다. 음식 이름을 알아들으셔도 그 음식이 어떤 것인지는 인지하지 못할 때가 많아 직접 먹어보고 나서야 고개를 끄덕이셨다. 식사 도중 조금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뭐가 컵인지, 밥그릇인지 구별하지 못했다.     


아들은 궁금했다고 합니다. 아빠가 바라보는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아들이 찍은 사진들은 그런 아빠를 이해해보려는 매개가 돼주었죠. 그전에는 자세히 쳐다볼 일이 별로 없었던 아빠의 얼굴이 새삼스럽게 다시 보였습니다. 아빠의 눈빛, 아빠의 몸짓, 아빠의 말들, 그 모든 것이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낮에 찍은 사진을 밤에 다시 열어보는 그 시간이 아들에겐 '반성의 시간'이 됐다고 합니다. 낮에 내가 왜 아빠에게 그랬을까. 좀 더 잘해드릴 수도 있었을 텐데….     



그렇게 1년 남짓 이어진 사진여행의 결과물이 책으로 만들어져 세상에 나왔습니다. 대개는 가족이 아프면 밖으로 드러내지 않으려는 사람이 많죠. 하지만 아들 신정식 씨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아빠는 기억을 잃어가지만, 책을 통해 더 많은 사람이 아빠의 존재를 알게 됐으면 좋겠다고. 그래서 더 많은 사람의 기억 속에 아빠라는 존재가, 아빠의 이름이 기억됐으면 좋겠다고 말이죠.     


외로움. 아들은 아빠의 삶에서 그 낱말을 지우고 싶다 했죠. 결국, 사진을 찍고 책을 낸 것도 아빠가 외롭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만든 겁니다. 뭉클했죠. 신파로 흐르지 않는 아들의 마음 씀씀이에 감동했습니다. 그러면서 지금도 서먹하게 지내는 저와 아버지와의 관계를 생각했습니다. 이 사진집에 실린 사진들은 거창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하지만 그것이 건네는 울림은 깊고 넓더군요.     



이를테면 사진집을 넘기다 보면 하얗게 비어 있는 페이지가 군데군데 나옵니다. 아빠의 기억이 부분부분 지워졌음을, 치매를 앓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이 이런 모습임을 보여주기 위한 사려 깊은 여백이죠. 심지어 아들은 책 뒤에 <아빠를 위한 매뉴얼>이란 이름으로 열 가지 주의 사항을 직접 적어 놓았습니다. 이 내용을 읽으면서 또 한 번 가슴 뭉클했죠. 이 가운데 열 번째 항목을 읽어봅니다.     


10. 길을 걷다가 강아지를 발견하면 무조건 알려드릴 것.     


자꾸만 이 사진집을 뒤적거렸습니다. 제 마음이 책에서, 책에서 본 사진에서, 아들이 쓴 일기에서 떠나지 못하고 서성거립니다. 아들과 함께 지금도 어딘가를 걷고 있을 아빠의 이름은 신현성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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