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이 처음 호남 좌수사에 제수되었을 때 왜적이 침입한다는 정보가 다급했다. 왜적을 막는 것은 바다에 달려 있었으나 공은 바다를 방비하는 요해처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공은 날마다 포구의 남녀 백성들을 좌수영 뜰에 모아놓고 저녁부터 새벽까지 짚신도 삼고 길쌈도 하는 등 하고 싶은 대로 하게 하면서 밤만 되면 술과 음식으로 대접하였다.
이순신은 왜 그랬을까? 이어지는 구절을 계속 읽어봅니다.
공은 평복 차림으로 그들과 격의 없이 즐기면서 대화를 유도했다. 포구의 백성들이 처음에는 매우 두려워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친숙해져 함께 웃으면서 농담까지 하게 되었는데, 그들의 대화 내용은 모두 고기 잡고 고개 캐면서 지나다닌 곳에 관한 것들이었다. ‘어느 항구는 물이 소용돌이쳐서 들어가면 반드시 배가 뒤집힌다.’ ‘어느 여울은 암초가 숨어 있어 그쪽으로 가면 반드시 배가 부서진다.’라고 하면, 공이 일일이 기억했다가 다음 날 아침 몸소 나가 살폈으며 거리가 먼 곳은 휘하 장수를 보내 살펴보게 하였는데 과연 그러하였다.
답이 나왔습니다. 바다의 물길과 지형을 파악하기 위해서. 백성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서 절로 술술 말하게 했다는 겁니다. 조금 더 읽어보겠습니다.
급기야 왜군과 전투를 하게 되어서는 번번이 배를 끌고 후퇴하여 적들을 험지로 유인해 들였는데, 그때마다 왜선이 여지없이 부서져 힘들여 싸우지 않고도 승리하였다.
송 좌상(송시열)이 예전에 그의 손님에게 이 이야기를 해주면서
“장수만 그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재상 역시 그처럼 해야 한다.” 하였다.
백성과 하나 된 이순신. 백성의 장군. 백성 속에서 백성과 함께 싸우는 장수. 그래서 당대의 대학자 우암 송시열도 그런 미덕을 본받아야 한다며 높게 평가한 겁니다. 이제 마지막 대목을 읽어볼까요.
그러나 충무공이 물길에 익숙했던 것은 포구의 백성에게 들어서만은 아니다. 여러 차례 해진의 장수를 지낸 어영담이 물길의 요해처를 잘 알았기 때문에 공을 도운 것이 많았으니, 견내량 해전과 명량 해전은 오로지 지리를 이용해 승리를 거둔 경우이다.
이순신은 이기는 법을 알았던 장수였습니다. 필요하면 백성들에게도 정보를 얻고, 부하 장수에게도 조언을 구했죠. 이 일화에서 우리는 이순신의 열린 자세를 보게 됩니다. 이순신은 모든 것을 다 아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모르는 것을 알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고, 그러기 위해서 백성에게, 부하들에게 스스럼없이 다가섰습니다.
백성의 마음을 얻어 전투에서 승리한다는 이 일화는 이순신 서사에 한 획을 그은 대단히 중요한 기록입니다. 이 기록은 조선 후기 문신인 청성 성대중(成大中, 1732~1809)의 문집 『청성잡기 靑城雜記』에 실려 있습니다. 제목을 풀이하면 ‘청성이 쓴 잡다한 기록’이 되겠죠. 말 그대로 온갖 잡다한 것들을 참 착실하게 모아서 정리해 놓았습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의 성언(醒言), 즉 깨달음을 주는 글이라는 장에 이순신에 관한 일화 세 편을 기록해 놓았습니다. 위에 소개한 일화가 가장 널리 인용되는 글입니다. 최근에 『이순신을 찾아서』라는 주목할 만한 책을 펴낸 문학평론가 최원식도 이 일화를 중요하게 거론하고 있습니다. 적을 공격할 때도 백성의 안전을 깊이 생각하는 지도자의 모습. 우리 시대의 현실과 겹쳐지는 장면이죠.
이순신 서사가 주는 의미는 전혀 퇴색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시대에 이순신에 관한 이야기들을 읽어나가야 할 이유입니다. 이순신의 리더십을 꽤 오래 연구해온 김헌식도 최근에 펴낸 『청년 이순신, 미래를 만들다』에서 위에 소개한 이순신의 일화를 대단히 중요하게 봤습니다. 『청성잡기』에 수록된 전문을 인용하면서 이렇게 평가합니다.
무엇보다 그는 혼자만의 어떤 초인적인 능력으로 정보를 알아내고 준비하지 않았다. 초인적인 능력을 강조하는 것은 위인전에서 현실을 왜곡하는 것이다. 『난중일기』나 「장계」 등에서 여실히 알 수 있지만, 정보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그는 혼자만의 세계에 갇혀 있지 않고 끊임없이 사람들 속에서 이야기하고 대화하면서 정보를 얻고 그것을 그들을 위해서 활용했다.
최원식 평론가도 단재 신채호가 쓴 『수군제일위인 이순신』의 서술 태도를 『청성잡기』의 기록과 함께 검토하면서 다음과 같이 결론 내립니다.
바로 이 미덕으로 단재의 충무는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한으로 고독한 영웅주의 또는 허무의 개인주의로 질주하는 춘원류 이순신상으로부터 결정적으로 단절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순신 서사는 다시, 꼼꼼하게 읽혀야 합니다. 성대중은 『청성잡기』에서 이순신과 유성룡의 첫 만남을 지금까지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이순신이 어린 시절 유성룡, 원균과 같은 동네에서 어울렸다는 설정은 대하드라마로도 만들어진 소설 『불멸의 이순신』 이후 정설이 되다시피 했죠.
서애 유성룡이 옥당의 관리로 있을 때 귀성하기 위해 한강을 건너는데, 강물은 불어나고 건너는 사람은 많아 서로 앞다퉈 배에 오르느라 자못 소란스러웠다. 이때 무인으로 보이는 길손이 평복 차림으로 홀로 말을 끌고 배에 올랐는데, 어느 술 취한 자가 뒤따라 올라서는 그가 자기보다 먼저 배에 오른 것에 화를 내며 거침없이 욕을 해댔다. 그러자 배에 타고 있던 자들이 모두 분개하여 심지어 그를 대신해 싸우려고까지 하는데도 정작 길손은 머리를 숙이고 채찍을 늘어뜨린 채 강을 다 건너도록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하였다. 서애도 속으로 그를 나약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자, 그럼 저 무례한 취객은 나중에 어떻게 됐을까요?
배가 나루터에 닿자 길손이 말을 몰고 먼저 내려 말의 뱃대끈을 바짝 조이고 있었는데, 술 취한 자가 계속 욕지거리를 하면서 뒤따라 내렸다. 알고 보니 대갓집 하인이었다. 길손이 왼손으로 말고삐를 잡고 오른손으로 술 취한 하인을 움켜잡는데 맹호가 토끼를 후려치듯 민첩하였다. 칼을 뽑아 목을 베어 강물에 던져 넣고는 낯빛도 변하지 않고 말에 올라 곧장 떠나 어느새 사라져 버렸다. 나루터에서 그 모습을 본 자들이 모두 크게 놀라 넋이 빠져 있는데, 서애만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이 사람은 대장감이다.”라고 감탄하였다. 항상 그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는데 뒤에 군문에서 살펴보니 바로 훗날의 충무공이었다.
재미있지 않나요? 이 일화가 만약 사실이라면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유성룡은 31살, 이순신은 27살이었습니다. 『청성잡기』의 저자 성대중이 있지도 않은 허무맹랑한 ‘썰’을 자기 문집에 이토록 자세하게 적어놓았을 리가 있을까. 그렇다면 이 일화가 갖는 무게를 결코 가볍게 봐서는 안 되지 않나 싶습니다.
순전히 이순신에 관한 기록을 원문으로 확인하기 위해 2012년 올재에서 출간한 성대중의 『청성잡기』를 찾아 읽었습니다. 김헌식의 『청년 이순신, 미래를 만들다』가 마중물이 돼 주었고, 책을 읽어나가는 과정에서 최원식의 『이순신을 찾아서』가 맥락을 살피는 눈을 열어줬습니다. 이순신이라는 서사의 바다는 넓고도 깊습니다.
※ 이 글은 아트렉처(https://artlecture.com/)에 먼저 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