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비젠탈 《모든 용서는 아름다운가》(뜨인돌, 2019)
나치가 앗아간 89명의 목숨. 그 끔찍한 학살의 광란에서 살아남은 건 차라리 기적이었습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89명이나 되는 일가친척을 잃은 시몬 비젠탈(Simon Wiesenthal, 1908~2005)은 전쟁이 끝난 뒤 나치 사낭꾼(Nazi Hunter)이 되어 전 세계로 달아나 숨은 나치 범죄자 1,100여 명을 찾아내 법과 정의의 심판대에 세우죠.
불멸의 저작으로 꼽히는 《해바라기: 용서의 가능성과 한계에 관하여》는 비젠탈이 쓴 홀로코스트 체험기입니다. 1969년 파리에서 독일어로 출간되고, 이듬해인 1970년 영어로 번역됐습니다. 이후 30년 가까이 흐른 1997년 비젠탈의 《해바라기》와 거기에 대한 세계 각국 인사 53명의 답변을 묶은 〈심포지엄〉을 합친 판본이 출간됩니다. 우리말 번역본이 처음 나온 건 2005년이었고, 지난해 완역본이 국내에 출간됐죠.
저자가 이 책에서 던진 질문은 한없이 무겁습니다. 수용소에 갇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나날들을 보내던 저자는 어느 날 강제 노역을 위해 수용소 밖으로 나가게 됩니다. 자기가 나고 자란, 그러나 지금은 너무도 낯설어진 거리에서 저자는 우연히 군인 묘지에 피어 있는 해바라기를 보게 됩니다.
나는 넋을 잃은 채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 꽃은 밝은색이었으며 나비들이 이 꽃에서 저 꽃으로 날아다니고 있었다. 혹시 이 무덤에서 저 무덤으로 무슨 소식이라도 전해주는 것일까? 그렇게 해서 꽃에게 뭔가를 속삭여 주면 무덤에 누워 있는 군인에게도 전달되는 것일까? 그래, 바로 그것이었다. 죽은 사람들은 이 꽃들을 통해 햇빛과 소식을 전달받고 있었던 것이다.
문득 나는 죽은 군인들이 부러워졌다. 그들 모두는 이 세상과 연결되는 해바라기를 한 그루씩 갖고 있었으며, 나비가 그들의 무덤을 찾아와 주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겐 해바라기가 없었다. 내가 죽으면 그저 다른 시체들과 함께 커다란 구덩이에 던져질 뿐이었다. 내가 누운 어둠 속에 햇빛을 가져다줄 해바라기도 없을뿐더러, 내가 파묻힌 무시무시한 무덤 위에는 나비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을 것이었다. (…) 죽고 나서도 그들은 우리보다 더 나은 존재였던 것이다…….
가해자의 무덤 자리를 환하게 밝혀주는 해바라기. 그 역설이 상기시킨 불가해한 현실. 그런 상념에 젖어 작업장에 도착한 저자에게 뜻밖의 상황이 벌어집니다. “당신 유대인이죠?” 그렇게 불려간 어느 병실에서 저자는 숨이 꺼져가는 한 독일군 부상자를 대면하게 되죠. 카를이란 이름의 그 독일인은 자기가 나치 친위대에 자원입대했다며, 우크라이나의 한 마을에서 유대인을 집단 학살한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저는 죽기 전에… 제 죄를 자백하고 싶었습니다. 그게 제가 마지막으로 원하는 고해였습니다. (…) 제가 말씀드린 이야기가 끔찍하다는 건 압니다. 죽을 날을 기다리며 여기 누워 있는 기나긴 밤 내내, 저는 누구든지 유대인을 만나면 모든 것을 고백하고 용서를 구하고자 했습니다.
죽음을 목전에 둔 나치 친위대 병사는 저자에게 ‘용서’를 간청합니다. 하지만 저자는 아무 말 없이 그 방을 떠나죠. 이후 수용소에 돌아와서도 저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되묻습니다. 그때 내가 침묵한 것은 과연 옳은 일이었을까. 그러면서 글의 마지막을 다음과 같이 맺습니다.
내 인생에서 벌어진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읽은 독자들도, 나와 입장을 바꾸어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어볼 수 있을 것이다. “과연 나라면 어떻게 했을 것인가?”
저자가 던진 이 질문에 대한 세계 각국의 종교 지도자와 작가와 철학자 등등의 대답이 책의 나머지를 채웁니다. 53명이 저자에게 화답한 글을 하나하나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들의 ‘대답’은 또 다른 ‘질문’일 수밖에 없다고. 독일인 언론인 한스 하베는 편지에 이렇게 썼습니다. “나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는 우리로 하여금 그들을 용서할 수 없도록 만든 일일 것입니다.”
조금 다르게 생각해보면, 시몬 비젠탈과 같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에게 가해자를 향한 ‘용서’를 고민하게 했다는 사실이야말로 나치가 저지른 가장 끔찍한 범죄가 아닌가 합니다. 미국 출신의 이스라엘 언론인 요시 클라인 할레비는 이렇게 말했죠. “쓰라린 은둔 속으로 사라지는 대신 우리가 사는 세계에 다시 합류하는 과정에서, 시몬을 비롯한 생존자들은 사회적 도덕적 정상화에 대한 부담을 떠안았다.”
이 책에서 우리는 용서와 복수, 화해와 정의에 관한 수많은 질문을 만나게 됩니다. 짐승보다도 못한 야만의 시대에도 한없이 고결한 정신을 보여준 이들의 자취는 숭고하다 못해 놀라움을 주죠. 여러 답변 중에서도 가장 의미심장하게 다가온 건 미국의 유대교 신학자 아브라함 요슈아 헤셸이 소개한 어느 랍비의 일화입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어느 랍비가 집에 가기 위해 기차를 탔는데, 같은 객실에서 카드놀이를 하던 상인 몇이 조용히 명상에 잠긴 랍비에게 시비를 걸어 목적지까지 서서 가게 만듭니다. 그런데 도착하고 보니 랍비와 상인들은 목적지가 같았죠. 랍비가 기차에서 내리자 그를 존경하는 이들이 달려와 반깁니다. 그 모습을 본 상인이 물었죠. 저분이 대체 누군가요? 그러자 이런 대답이 돌아옵니다. 저분을 모른단 말이오? 그 유명한 우리 마을 랍비시라오.
상인은 큰 충격을 받고 랍비에게 다가가 용서를 구하지만, 랍비는 그를 용서하지 않습니다. 이후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던 상인은 집까지 찾아가 랍비에게 용서를 구했고, 그래도 안 되니 랍비의 아들을 찾아가 통사정을 하죠. 아들이 적당한 시기에 아버지에게 상인 이야기를 꺼내자, 랍비는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나는 그를 용서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구나. 왜냐하면 그는 내가 누군지 몰랐기 때문이지. 사실 그는 유명한 랍비가 아닌 어느 이름 없는 사람에게 죄를 지은 거란다. 그러니 그 상인한테, 나 말고 그 이름 없는 사람을 찾아가서 용서를 구하라고 말해 주려무나.”
여러분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